DONUT

부제: 도넛 파티와 집회 후기

 

어린 소녀는 소문으로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저기 네모난 상자 같은 곳에서 매일 저녁 재미난 일이 벌어진다는 걸요. 그 상자 속의 사람과 운율과 공기는 기쁨의 모양이든 슬픔의 모양이든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파란색과 하얀색 원들이 상자 주위를 진 치고 있었어요. 빛나는 원과 나무 상자는 밤만 되면 구름 위 두둥실 틈 사이 새어나오는 빛으로 눈부셨어요. 하지만 어른들은 그곳에 가면 안 된다고 했어요. 상자를 지키는 원들은 어린 아이를 싫어해서 아이가 상자에 들어가려고 하면, 원이 빨간색으로 변하면서 평생의 불운을 가져다준다고 했어요.

그곳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아이들은 원이 무슨 색으로 변하든 상관이 없는 걸까요? 손가락질도 빨간색 원의 딱지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어요.

 

눈앞에 아른거리는 가짜 아닌 행복을 매일 놓치는 불쌍한 소녀는 손톱으로 나무껍질에 슬픔을 새기기 시작했어요. 어른들에게 일기장을 들키는 순간 진짜 불행이 시작될 것을 알기 때문이었어요.

- 비극은 멀리 있지 않다

헐어가는 붉은 손가락은 어떤 고통도 주지 못했어요. 커다란 슬픔 앞에 고통은 무력했어요. 그날 저녁 잠들기 전, 상자에서 흘러나오는 보드라운 음악소리에 견디다 못한 소녀는 잠옷차림으로 상자를 찾아갔어요.

‘제발, 색이 변하지 않게 해주세요.’

 

상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큰 음악소리에 머릿속이 징- 울리고 흔들렸어요. 쉴 새 없이 바뀌는 공간과 음악이 마치 상자를 빠르게 굴리는 것 같았어요. 시끄러운 음악, 조용한 음악, 화내는 음악, 달래는 음악, … 구르는 상자에 몸을 맡기고 구르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몸을 흔들며 생애 최고의 날인 마냥 웃고 있었어요.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와 붉은 색, 이리저리 뻗어가는 선 말고 무엇이 있겠어요?

 

어른들은 왜 사랑과 음악만을 좇는 그들을 상자에 모아두고 광신도들처럼 묘사했을까? 머릿속은 여러 목소리들로 괴로웠지만, 잘 시간에 없어진 소녀를 찾을 어른들을 생각하니 소녀는 서둘러 상자를 빠져나와야 했어요.

나와서 바라본 상자는 항상 선망하던 모습 그대로였어요. 파란색과 하얀색 원들도 변함없이 빛을 내고 있었어요.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땐, 조금의 시간이 흘러있었어요. 상자 속에서 보낸 시간들은 홀연히 사라진 거예요. 주저앉아 허망한 기분을 곱씹어 봤어요. 하지만 아무에게도 상자가 준 행복과 텅텅 빈 허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어요.

 

아, 적지 않으면 안됐던 거예요.

그 순간들을 그저 시간에 날려 보내지 않기 위해서

 

 

-

시위에 가서 가족을 모두 빨갱이로 만들 생각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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