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정말로 너답다는 말이 어울렸다. 알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알게 하고, 앓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값진지를 알게 했다. 그 무수한 여명과 술병들 사이에서 알음을 앓게 했고, 앓음을 알게 했다. 알아갈수록 앓고, 앓아갈수록 알았다. 그 너다움은 아름답다라는 말로 부족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넘치는 것이었다. 어떤 새벽에서 네가 스며든 말을 기억한다. 술냄새 짙은 길거리의 횡단보도 끝에서 스친 손가락을 기억한다. 기다리던 버스를 기다리지 않게 되었던 시간들을 기억한다. 너는 키읔이 아니라 히읗으로 웃었고, 그 히읗은 알음과 앓음들 사이를 마구 오고가며 나의 잔가지를 흔들어댔다. 그리고 어느 겨울, 되돌릴 수 없을만큼 너를 알아갈 때쯤에도 그 히읗은 알음의 왼쪽 모퉁이를 받쳤다. 난 너의 이름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히읗으로 웃었다. 발자국 사이로 그 자음 나부랭이가 왕복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러하듯이, 나의 어린 시절은 항문에 함몰되어있었다. 어른들은 늘 항문밖에 답이
없다는 식이었고, 우리는 그것밖에 방법을 몰랐다. 거기다가
뇌가 꽤나 민감했던 나는 도서관을 들락날락하며 책을 펼칠 때가 많았고 어머니는 늘 그것을 걱정했다.
“집에서
책 읽고 가는 게 낫지 않겠어? 밖에서 갑자기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하지만
나는 나의 절제력을 믿고 출발하는 일이 잦았고, 버스 한 켠에서 밀려오는 학구열을 참지 못한 채 급하게
내려 근처의 도서실로 뛰어가는 일도 많았다. 그렇게 다들 분주하게 괄약근을 놀리는 사회에서 나는 빌어먹을
뇌 때문에 도태되고 있었다. 이미 내 별명은 “책쟁이”로 자리 잡았고 제법 그럴듯한 배설을 하는 녀석들은 이미 선생님의 예쁨을 받았다. 어떤 녀석은 지나치게 몰두하다가 장염을 얻어서 무시당하기도 했지만, 내가
앓는 학구열에 비하면 별 거 아닌 취급이었다.
“들었어? 저 새끼 오늘 도서관만 벌써 4번째야.”
내
뒤로 따라붙는 아우성들은 하나같이 지저분한 말 투성이다. 학문, 공부, 도서관, 서재.. 어떤
이는 듣기만 해도 구역질을 할 만한 단어들이 내게는 너무 익숙한 수식어가 되어버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그들의 불문율을 마구 헤집었고 그 결과물은 이렇다. 난 책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 빌어먹을. 펜 같은 삶. 다들
배설능력평가시험을 앞두고 한창 괄약근을 바쁘게 놀릴 때도 나는 펜을 쥐거나 안경을 걸치며 책을 읽기에 바빴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선생님은 내게 넌지시 항문 외의 길들을 논파했다. 난
차마 그 앞에서, 내가 학문 때문에 항문에 집중하지 못했노라 고백할 수 없었다. 말없이 거짓말을 하던 그 날의 태양은 무척 파란색이었다. 아뿔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