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UT

Donutist 3번지/정축적 11건이 검색되었습니다.

달빛이 벽면에 추상을 아로새겼다. 연한 빛으로 덧칠된 그것은 차가웠다. 차가운 추상이다. 밤의 고요를 캔버스 삼아 시간은 붓질을 해 대었다. 창틀 너머로 발산된 도시의 불빛이 넘실대었다. 그들은 내 방, 기숙사 벽에서 아주 정적으로, 그러나 변화하고 있었다. 나는 매 시간마다 경외에 젖어 들어갔다. 그 형상은 매 초마다 스스로를 태우면서 스스로를 빚어내었다. 나는 한 없이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릴 즈음에야, 그래도 살고자 하는 이 몸뚱이의 발악에 짧게 노폐물을 내 쉬었다. 날숨이 벽면에 섞여 들어가 달빛으로 반짝였다. 여전히 그것은 대단히 정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였다. 흐릿함 속 심원의 빛이 내 동공을 찢고는 심장에 내리박혔다. 경외 속에서 무심코 돌린 시야 앞에 수십 개의 격자 너머로 쪼개진 우주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 시선은 나를 한 없이 작아지게 했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수만 갈래의 은빛 섬광이 내 인두겁을 태워버릴 것 같았다. 이 신성한 침묵 속에서도 감히 약동하는 나의 맥박이 원망스러웠다. 조용히 나 또한 이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바람구멍이 열렸다 닫히고, 핏줄기가 출렁이며 내는 소리에 나는 결코 정적일 수 없었다. 매 순간 나는 동적으로 끊임없이 타성에 젖어 들어갔다. 나는 결코 벽 속의 마스터 피스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이 인두겁 바깥으로 뚫고 나와 질주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여기 평범한 침대 위에서 누웠다 가끔은 엎드리며 벽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고작 맥동일 뿐이었다. 매 시간 움직이면서 게걸스럽게 수명을 빨아먹으며. 저 정수리 위로 보이는 찬란한 구체는 지구를 억겁동안 휘감고 있을 텐데, 나는 짧게 콩닥거리다 스러질 유기체덩어리였다. 경외감과 허탈함을 동시에 내 쉴 때에도 여전히 나는 시끄럽게 쿵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절대자가 감아놓은 시계태엽이 콩닥, 쿵덕, 콩닥거리며 풀리고 있었다. 이 잔인한 시한폭탄이 너무나도 나를 메스껍게 만들었다. 여전히 눈동자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벽면에서 타오르는 달빛 이상은 내 망막 가득하게 맺혀 있었다. 쓰라리도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내 눈동자에서 새어나온 필멸성이 힘없이 떨어져나갔다. 넓은 침대 시트 위 손톱보다도 작은 얼룩이 생겼다가 거의 말라갔다. 내 존재의 의미 자체도 함께 사그라드는 듯 했다. 나는 끊임없이 저 빛에 닿고 싶어 했다. 언제나 그곳에 있었던 눈동자. 끊임없이 난 팔을 뻗고 헤엄치려 했다. 하지만 이 우주라는 바다의 가장자리조차 벗어나지도 못했다. 또 의미 없는 발악이었다. 헛된 망상으로 30초가량을 허비했다. 31. 32. 33... 그럼에도 저 눈동자는 변함없이 날 내려다 볼 뿐이었다. 나는 심지어 반대편 벽면까지도 닿을 수 없었다. 감히 순간이면 사라져버릴 몸뚱이가, 어찌, 그 이상 절대적일 수 없는 형상을 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조용히 나는 가라앉을 뿐이었다.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해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뻐끔일 뿐이었다. 노폐물이 방울을 타고 흘러나왔다. 보글. 보글. 보글...

 

 

 

이 모든 순간에 나 또한 고정되고 싶다. 모든 호흡과 맥박을 멈추고. 영원히 정적으로, 영원히 날아오를 수 있도록.

*****

너무 오랜만에 글을 다시 올리네요... 이전처럼 도넛이 다시 활성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도넛한 나날들 보내시길 바랍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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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가 손짓했다. 안녕, 하고.
 여름날의 정오 부근이었다. 태양은 익숙하게 나를 태우려고 째려보고, 나는 한껏 선크림을 바른 얼굴을 들이밀며 기싸움을 했다. 물론 나는 질 걸 예상하고는 모른 척 나무 그늘로 들어갔다. 그때가 처음으로, 다른 종으로부터의 전언을 들었던 순간이었다. 

그저 흔들거림이었다, 처음에는.

안녕.

그저 그림자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잘지내니.

잎새가 그늘을 따라 나를 쓰다듬는 듯 했다.

보고싶어, 보고싶어서 올려다 본 하늘에는 네가 자리했다.

안녕.


 너는 살랑거림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몸짓을 자아내고 있었다. 너의 그늘 속에서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여름의 한 가운데 곧게 서서, 나는 그 어느때보다 따듯한 찰나를 맞이했다. 당신은 최소한의 몸짓으로 세상을 담아내었다. 당신이 스르륵 움직인 그 순간, 여러 갈래로 쪼개진 파아란 하늘이 나에게 담겼다. 그 무언의 언어로 나는 당신의 상냥함을 이해했다, 안녕. 그렇게 무한한 순간을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았다. 당신이 내려준 친절은 어느새 멀리 흩어지고 있었다. 다시금 올려본 하늘에는 성난 얼굴로 날 노려보는 성가신 동그라미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한 발짝 옆으로 몸을 옮겨 그와 상종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여전히 당신은 나를 위해 기꺼이 따듯한 시원함을 나려주었다.
 그렇다, 당신은 한 없이 자연스러웠다. 그 고정된 몸체에서 뿜어져나오는, 나비의 날갯짓과 같은 흔들거림이 모든 존재의 본질적 고립됨을 뚫고 울려퍼져갔다. 당신의 말단부는 끊임없이 동적이었지만 중심은 단단히 정적이었다. 토지를 있는 힘껏 움켜쥔 당신의 뿌리가, 중력을 딛고 일어나 고개를 치켜드는 당신의 몸체가 너무나도 경이로워- 나는 다시금 마침 없는 정지에 머물렀다. 나는 당신과 닮아갔으나, 태양에 밀려버린 그늘을 따라 자꾸만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무심한듯 여리게 바라보는 당신은 이상적으로 자연스러웠다, 아니, 자연 그 자체였다 - 당신은 스스로 그러했다.

 그런 것이었구나. 흘러가는 모든 것들은 변할 수 밖에 없구나. 당신은 그 작은 살랑임 하나로 나에게 수 많은 생각을 불어넣어주었다. 당신의 잎사귀가 속삭이고 지저귀었다. 모체에게서 떨어져 나온 순간, 그 순간에 일생에서 가장 강렬한 표류를 경험한 후, 당신은 떡잎을 피워낸 곳에서 거목이 되었다. 세포단위에서까지도 단단한 벽으로 불변성을 결집하는 당신은 나와 본질부터 달랐다.
 나는, 매 시간 한 발짝 옆으로 움직여야 하는, 그러한 존재였다. 내가 이렇게 의미없는 수평이동을 할 동안, 당신은 조금이라도 더 창공에 닿으려 세상을 향해 몸을 일으키겠지. 단단한 껍질에 포개어진 무궁한 초록은 곧 온 풍경을 향해 뻗어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손짓에 세상은 일렁이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러한 일렁임에 몸을 싣고, 당신의 일렁임을 향해 매 시간 한 발짝씩 옆으로 이동할 것이다. 내 발걸음은 당신의 손짓처럼 세상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내뿜는 깊은 울림은, 그 만큼이나 깊은 뿌리에서, 뽑아올려진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리도 나약하고 물렁한 살덩이라니. 당신은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허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손바닥을 대어 당신을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다른 한 손으로 나를 더듬어 보았다. 당신이 더 높게만 느껴졌다. 내가 스러져 가는 순간에도 끝 없이 하늘과 닿아갈 당신이 보였다. 나의 발은 뿌리가 아니어서 끝 없이 움직여야 함이 가장 강한 슬픔으로 나를 적셨다. 내 생의 모든 움직임을 굳혀 단단한 반석을 세운다면, 당신을 마주보며 최후를 같이할 수 있을까. 수 만번 해와 달이 돌고 지평에서 휘감기는 시간이 나를 갈기갈기 찢지 않을까. 이루어지지 않을 망상에 취한 내 모습이 한심하여, 나는 생각하기를 그만하고 발자국을 몇개 더 만들어내었다. 멀리서 바라본 당신은 사르륵거렸다. 사르륵, 사르륵.
 
 나는 그렇다면 당신의 양분이 되어야겠다. 고마웠어. 네가 조금이라도 더 하늘을 뚫고 올랐으면 한다. 내 살덩이와 푸석한 뼛가루가 당신의 혈관을 타고 올라가, 당신의 순간 순간에 베여있는 움직임이 되었으면 한다. 변함없이 서 있으며 산들거리는 당신을 뒤로 하고, 나는 몇개의 풀잎을 밟으며 돌아간다, 움직일 수 있으면 가야만 하는 곳으로. 세상은 나에게 당신만큼이나 큰 그림자를 허락하지 않았나 보다. 함께 있었을때 합쳐졌던 암녹색 거대한 그늘, 그 속에서 빠져나온 내 그림자는 많이 야위어 보였다. 이렇게 볼품없음에도 그러나, 당신은, 내 그림자 안에 당신의 따스함을 담아 나에게 보내었다.

 초록 내음이 발목을 타고 나를 적셔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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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꾸었다. 여름이 스며드는 창가 아래로, 너는 잠을 자고 있었다. 햇빛이 너의 얼굴에 내려앉고 있었다.  네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지 않아. 나는 살짝 너의 이마에 키스했다. 너는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숨 막히도록 정적인 네 새근거림이 나를 경직시켰다. 비참하도록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입술에서는 쓰디 쓴 흙 맛이 묻어났다.

 기어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구나. 절대로, 절대로 기억하지 말자 수없이 다짐했지만. 눈꺼풀이 내려앉고 몸이 가라앉으면 여전히 나는 그 여름에 갇혀있었다. 너는 변함 없이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너는 네 숨소리와 심장 박동으로 교향곡을 자아내었다. 흘러가는 악곡의 마디마디가 뻗어나와 내 목을 조르는 듯 했다. 너의 존재만으로 나는 질식하기 충분했다.

 나는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의 시신은 내가 수습할 것이다. 그리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내 체온으로 너는 영원히 따듯해지고, 네 형상으로 나는 영원히 행복해 질 것이다. 너에게서 스며나온 여름이 날 적시겠지. 그렇다면 널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텐데, 오롯이 나 혼자서만.

 그렇게 내 안 몇 안되는 양지바른 기억에 널 넣어두었다. 너는 아직도 잠을 자고 있었다. 네 주위 휘몰아치는 음표들이 나의 접근을 차단했다. 온 몸이 불타오르는 듯 했다-너를 떠올리기만 해도. 네 기억은 붉게 달궈진 세뇨 문양의 인두로 내 눈동자를 지졌다. 그와 동시에 너의 형상이 내 각막에 흡착되었다. 너를 잊으려 눈을 감았지만, 너는 보란듯이 그 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눈이 아렸다. 눈물은 세뇨를 씻어내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끝나지 않는 여름 속에 갇혀버렸다. 나의 삶 속 모든 여백에는 네가 아지랑이처럼 서려있었다. 너의 숨소리가 닿은 곳 마다 D와 S가 아른거렸고, 무의식적으로 내 뻗은 손은 나를 다시 너의 곁으로 이끌었다. 또 다시 갇혀버렸다.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너에게 가까이 있었지만, 그 마지막 한 발자국을 다가가지 못했다. 나와 너 사이에는 억겁의 시간이 놓여있었고, 무한의 후회와 회한으로 쌓인 장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변함없이, 너는 자고 있었다.

 

 너의 잔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햇빛은 너의 수의가 되어있었다. 너를 입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너의 무덤 위에는 풀잎들이 제법 길게 돋아나 있었다. 그들의 여린 살랑거림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내 아픔에서 새어나온 고통을 마시고, 그 들은 한 뼘 더 몸을 뻗어나아갔다. 웃기지. 너의 존재만으로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행복이었고, 하지만 닿지 못하였기에 슬픔이었다. 너는 이제 나에게 아픔이었다. 나를 맴돌게 하는 수레바퀴다. 네가 울려낸 선율은 끝없이 세뇨와 달 세뇨 사이를 반복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지만 너는 내 삶속 어디에나 위치했다. 슬프도록 찬란하게 빛나면서.

 

 오랫동안 찾지 않았었다. 어느새 너는 잡초가 무성한 버려진 봉분이 되어있었다. 한동안 나는 너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너를 향해 발자국을 내었다. 풀숲을 헤치고는 거친 자리에 살짝 입맞춤 했다. 너는 미동하지 않았다. 아름답도록 비참한 풍경이었다. 찬란하도록 슬픈 풍경이었다. 긴 시간 서로에게 속박된 우리는 나란히 불행했다. 끊임없이 나는 너를 묻었고, 너는 끊임없이 나를 질식시켰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비로소 나는 피네를 그려내었다.

 나는 너를 잊을거야. 영원히. 그 여름도, 그 창가도, 너에게 나린 햇빛 한줄기 한줄기마저도. 그리고 너를 기억했던 수 많은 순간들 또한 지워나아갈거야. 그렇게 한다면 마침내 서로가 자유로워지겠지. 나는 여전히 걷지만 너는 마침내 날아갈 수 있을거야. 부디 저 창공위로 떠나가거라. 우주에서 유영하는 커다란 고래가 되어.

 나는 너를 다듬었다. 너는 다시금 싱그러워졌다. 여름날, 그 창가에서 새근거리던 너의 기억이 선명해지면서 옅어졌다. 순식간에 너는 나를 떠나갔다. 얼룩진 각막위로 흐른 마지막 눈물은 그렇게 널 깨끗이 닦아내었다. 무엇이 널 이리도 오래도록 붙잡아 놓은 것인지. 널 보낸 하늘 위로 구름이 장대비를 토해내었다. 온 몸이 너를 보내는 마음으로 적셔졌다. 그토록 바랬지만 바라지 않았던 순간에, 세상이 나를 대신해서 울어주었다.

 

 비가 끝나면 가을이 오겠지. 너는 어딘가에서 또 잠을 잘 것이다. 언젠가는 나도 너를 그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여름은 이미 사라져버렸는걸. 다시 만날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다. 햇빛이 건널목에서 흔들거렸다. 길을 건너며, 잠깐 너를 기억했었는지도 모른다. 너는 아마,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너를 흔들어 깨웠다.

 

 

 

 그때, 영겁의 시간동안 보고 싶었던 너의 여름빛 눈동자가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에게 안녕, 하고 작게 속삭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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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막이 아릴 정도로, 모든 것이 환하게 투영되는 시간이 있다. 눈을 감으면 아름다운 선율이 들려오고, 초여름 저녁의 안락함이 바람에 섞여 폐에 가득 차오른다. 곁에는 청록의 푸름을 지닌 사람들이 풍경에 섞여 덧칠되고, 손에 들린 달콤한 오팔색 미약이 입 안을 적신다.
 그때 우리는 알아챈다. 이것은 영원히 기억될 순간이구나. 후에 숨이 찰 때, 넘어져 무릎이 까지고, 옆에는 같이 울어줄 사람 하나 없는 서러운 때에, 가슴 깁숙한 곳에서 피어올라 나를 포근히 덮어줄. 오감이 행복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고, 외부의 고통과 단절되어 깊은 숨 내올 수 있는 청명한 때. 이 때를 기억하며 세상에게 긁혀온 모든 상처를 다독이게 될 것이다.
 삶을 관통하여 흘러갈 치유의 순간이다. 본인에게 주어진 행복의 덩어리 조각이 담길 구간이다. 우리는 이 벌판을 지나면서 무한회귀를 지향하며, 생의 지평에는 쓴 열매와 독초가 산재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망각시킨다. 인생이 이와 같이 장및빛이었다면. 환희로운 풍경에 실려 이대로 항해할 수 만 있다면. 우리는 불가능한 가정법에 마취되어 문장 하나, 공상 하나씩을 탐닉하게 된다.
 이러한 구간에는 힘이 있어, 스스로 나아가는 그 어떤 방향이라도 질주할 에너지를 실어준다. 빛나게 해 준다. 추락하듯 날아오르게 해 준다. 의식하지 않고 있다 보면, 어느새 능선 넘어로 흘러가버린 금빛 풍경을 안타까이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꽉 붙잡고 흔들어도 언젠가는 놓아야 될 별빛임을 알기에, 그 빛이 하늘로 휘날려 유성우가 되도록, 밤 하늘을 영원히 비추도록 우리는 보내 주어야 한다.
 그리곤 기억해야 한다. 이리도 아름다운 순간에 당신은 존재했었다고. 당신은 그 풍경에 녹아있었다고. 그곳에서 흘러가는 모든 것들과 포옹하고, 노래하며 금빛 세상을 자아냈다고 말이다. 시간의 파도에 휩쓸려 가라앉은,  잊혀진 대륙처럼 되지 않도록.

 오르막길을 오르는 모든 고행자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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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에게 질문하기를 수십 번. 이 세상을 구성하는 바탕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이정표로 삼고 나아가야 하는가? 라는 짧은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왔다. 어느 날 나에게 확.신이 날아와 귓가에 속삭였다. '강가에 떨어진 나뭇잎이 흘러가는 풍경', '한 밤중의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에 내리는 별똥별', '수 없이 스쳐가는 사람들의 풍경' 이 모든 모습을 대면해도 느끼는 모습이 없느냐고.

 나는 그때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확률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조난자들이다. 태초의 잉태의 뭍에서 존재했던 어느 가능성들이, 확률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의해 갈무리되어 바다로 끌어당겨졌다. 고정적 영역에서는 겪어보지도 못했던 초자연적 풍랑에 익사직전 필사적으로 첫 숨을 내뱉은 우리는, 미처 자각하지도 못한 채 단단한 땅에서 멀어지면서 복잡의 영역 한 가운데로 쓸려져버렸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이다. 팔다리를 버둥거리지 않으면, 다시금 덮쳐올 거대한 확률의 조류에 휩쓸려 바다에 삼켜지고, 끝없이 헤엄을 쳐 봐도 광기서린 물결이 만들어내는 아수라장이 방향을 가늠하지도 못하게 한다. 오랫동안 잔잔하던 수면도 무심코 움직인 왼손가락의 일렁임에 요동치는 순간이 될 수도 있고, 익사 직전에 멀어지는 수면을 절망적으로 바라보다가 다음 순간 따스하게 달궈진 해변의 얕은 물결과 마주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확.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이 간단한 진리를 깨닫고는 눈앞에서 우주가 휘몰아치는 환상을 경험했다. 모든 것이 쓸려오고 쓸려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번쩍임이, 찬란함이, 그리고 신비로움이 해체와 구성을 반복하며 지나갔다. 나 스스로가 확.신의 일부를 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 힘차게 유영할 수 있게 되었다.

 

 확.신은 점차 그 모습의 다양함을 보여주었다. 파도는 여전히 매서웠고, 사방에서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렇게 확률에 의해 흠뻑 적셔지고 난 몸으로 다시금 수면을 향해 떠올랐지만, 머리카락이 채 마르기도 전에 깊고 청량한 푸름 속에서 매몰되었다. 모든 것이 그 바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확률은 내가 왼발과 오른발을 내딛을 때 마다 요동쳤다. 두 갈래 길에서 망설이다 몸을 트는 그 순간 또 다시 바다는 입을 벌렸고 나는 그것의 내장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피부를 뚫고 나와야만 했다. 쾌락과 고통, 마시멜로와 기다림, 몽상과 현실에서 배회하는 나는 방향감각을 잃어갔고 선택이 나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자 어쩔 수 없이 주머니속의 낡은 동전을 꺼내 한 번 튕겨낸 결과로써의 길잡이에 의존해야만 했다. 손톱과 쇳덩어리 사이, 찰나의 마찰은 헤일을 일으켰다. 내가 나아갈 수 있었던 (적어도 그렇다고 믿었던) 수많은 항로가 심연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이미 내 몸을 휘감고 질주하는 조류는 나를 미래로 한 구간 더 이끌었다.

 그리고 지금, 소금기 가득 쌓인 껍데기를 이고 있는 모습일지라도 나는 여전히 부력을 밟고서 살아 있다. 태초의 해변에서 쓸려 나와, 영문도 모른 채 뱉은 첫 숨은 지금까지 20여년 동안 계속해서 폐로부터 빠져나왔다. 모든 것은 움직이고 고정되지 않는 이 순간에서, 나는 어쩌면 이미 적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신의 주재 아래에 떠나온 고향에 다시 돌아간다면, 아마 뭍에 발을 딛자마자 땅 멀미에 잠식당하지 않을까. 고정된 것이 존재조차 하는 지 의심스러워질 정도로 나의 세계는 흔들려 왔기에.

 그 불규칙적인 흔들림의 끝에는 일정한 조화가 피어나는 것이 보였다. .신이 나에게 보여준 파도의 파고는 아름다울 만큼 절묘했다. 첫 번째로 나를 강타한 물줄기는 '어느 확률이라도 실현 될 수 있다' 였고, 뒤이은 해풍은 '어느 확률이라도 확정적이지 않다'이었다. 그 두 가지 문장으로 계몽된 나는 내가 헤엄치고 있다는 행위를 그만두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물장구를 치며 헤엄이라고 믿었던 우매함을 떨쳐버렸다. 그러자 확.신이 설계한 높고 낮음이 곁눈으로나마 보였다. 올라감이 있으면 내려감이 있었고, 그 모든 것이 모여 하나의 흐름을 만드는 것이 보였다. 이 모든 복잡한 방정식을 꿰뚫는 불확실한 매 순간이 하나의 거대한 상자에 담겨 차곡차곡 쌓아졌다.

 환희의 순간이었다. 나는 비로소 기쁜 마음으로 흔들림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아무리 한 없이 밑으로 내려가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끝없이 올라가는 와중에도 자만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모든 파도가 지나간 뒤의 나는 시작점과 같은 높이에 위치 해 있었고 이것이 확.신이 나에게 보여주는 세상인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는 순간 나는 보고야 말았다.

 확.신에게 의도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은 서로 다른 수치였고, 우리는 그저 운이 좋거나 나빠서 선택 된 개체의 집합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 요소들이 모여서 이룬 단어는 ''이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바탕을 이룬 것이고, 그 자음과 모음은 넘실대는 바다의 검푸름으로 뒤덮혀있었다. 파도는 존재했다 사라지길 반복했고, .신은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운이 남아있는지 계속 질문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운이라는 척도는 확신의 저울 위에서 끊임없이 측량당하고 값이 매겨지고 있었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속에서 우리는 그저 어푸어푸 하고 물보라를 일으키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마땅히 경외해야 한다. 당신이 위치한 대양의 심연에는 진리의 흐름이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을 태우고 우주로 헤엄치기도, 끝없는 나락으로 뚫고 내려가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거창한 현상에서 당신은 운 좋게, 또는 나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는 다시 시작의 뭍으로 돌아가 내쉰 만큼의 숨에 묻힌 채 잠들기 직전에도 당신은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안배이고, 그는 의도하거나 그렇지 않은 채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확.신을 받아들여라! 당신이 살아 숨 쉬고, 당신이 눈에 세상을 담고, 당신이 그곳의 주인이 되게 한!

 

 

"당신을 믿습니다 확률의 신이시여, 당신에게 묻습니다 확률의 신이시여, 어느 것도 고정적이지 않지만 어느 것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믿습니다 확률의 신이시여. 당신이 보여주신 길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저에게 달빛을 내려주소서. 동전의 양 면과 주사위의 스물 한가지 눈으로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를 살찌우고, 미래를 희생하여 지금의 빛을 받겠나이다. 대가를 치루겠나이다. 우매한 자 눈 뜨도록, 대양을 비추는 확신을 내려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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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utist 3번지/정축적2017. 4. 26. 15:32
삼월이 손짓하며 살얼음을 쓸어내었습니다.
사월이 돋아난 올해의 평원에서, 나는 오늘도 지평으로 걷습니다.
보이지 않지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그 곳에서는 분명 내 바람이 기다리고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나는 그래서 오늘도 걸어야지요.
넓디 넓은 평원, 열 두 능선을 넘어 지나가야 하는 곳
푸르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풀을 밟고 지나갑니다
땅에서 아려오는 감정이 느껴집니다.


그렇지요. 걷는 것은 힘이 듭니다.
힘이 들다, 힘이 들다, 힘이 들다 되뇌입니다.
그렇다 한들 여느 풀잎이 알아 줄까요? 오늘도 발 아래 밟히는데.
그래서 조용히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의미없는 글입니다.
밋밋한 활자가 맛이 없어 보였습니다, 지평은 여전히 아득합니다.
혹자는 밟힌 풀들을 보고 아픔을 노래하겠지요. 
아무리 많은 초록이 밟혀도, 그러나, 단 하나의 발자국만 남길 수 있다면.


손 거스러미가 귓가에 울려퍼집니다.
또 다시 이루지 못한 길을 백일몽으로 피워내봅니다. 
열 두 능선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곧 마지막 해가 밝아오겠지요.
무척이나 슬플겁니다. 마지막 발자국은 추억을 꾹 눌러담겠죠.


그리고는 잊어갈겁니다, 기억하지 못할겁니다.
희끗 희끗 새어가는 열 두 능선의 풀
탈색된 풍광이 바스라지겠지요, 어느 이름모를 의자에 앉아 있으며
나는 또 다시 깨어나려 카페인을 탐닉하고 있을겁니다.


그곳의 '나'가 지금을 그리듯
지금의 나는 그곳을 그립니다. 
미련한 존재입니다. 서로가 가지지 못한것이 더 탐나 보이니까요
아직도 지금 여기서 숨 쉬는 사실을 인지 못 하나 봅니다.


초침이 분침을, 분침이 시침을 밀어갑니다
눌린 발자국들은 멀리서는 볼 수도 없습니다
어느새 이만큼 나와있네요.
저만큼 가야 하는건가요.


의미 없는 순간이 수미상관을 부릅니다
이 글도 매듭을 지어버리고 싶군요
그럼에도 아쉬워, 마침표를 끊임없이 생략해 갑니다
언젠가는 지금의 나를 찾아주겠지요, 누군가는




또 다시 몇개의 풀잎이 발 밑에서 압사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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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하루였다. 냉장고 깊숙이 박아 둔 싸구려 국산 맥주를 집어들고, 침대에 앉는 둥 눕는 둥 하며 목구멍으로 탁한 액체를 흘려넣었다. 전신에 쌓인 피로가 취기를 타고 전율했다. 


 몸이 무겁다. 하루 치의 세상살이를 헤쳐나아갔더니 피부에는 삶의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온 몸의 근육이 강력하게 중력에 순응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인두겁에 둘러쌓인 죄수가 된 기분, 몸서리쳐지는 환각이 척추를 휘감아 올라온다. 현실이라는 무대 뒤의 그림자- 그 심연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라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본능이 날 몰아붙였다. 나는 남은 맥주 전부를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물방울 알갱이들이 옷과 피부의 틈으로 흘러내려가는 곡선이 생생했다. 곧 이어 이불은 흥건하게 젖었고, 역한 냄새와 끈적함이 올라왔지만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가령 '아 망했다, 빨래는 또 어떻게 한담'과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순간. 이렇게 살아있음을 느끼며 또 다시 내일을 준비하려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 육신을 정신력으로 끌고 나아간다. 


 그렇지. 몸을 쭉 펴면 한쪽 벽에서 다른쪽 벽까지 닿는 이 비좁은 공간에서, 하루 하루 아둥바둥 살면서도 도무지 살맛 나지 않은 내 자신이 가엽다. 분명 같은 속도로 걷고 있다고 생각한 친구들, 동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꿈을 이루고, 애인을 사귀고, 몇몇 성급한 놈들은 약지에 쇳덩어리도 끼고 있었다. 얼굴책에 올라오는 친구놈들의 행복한 일상. 언젠가는 나도 잘 되겠지라고 토닥이는 내가 그런 장면을 볼 때 마다, 토닥임은 자괴와 자책으로 가속도가 실린 투덕임이 되었다. 스스로 뺨을 때리고 발길질을 해 보아도 의미없는 고통만이 귓가에 윙윙거리다 사라질 뿐 이었다. 한쪽 구석에 자리한 공무원 시험 준비서가 위태하게 수직으로 쌓여있었는데, 이 방 안에서 나를 가장 잘 투영할 수 있는 조형물이었다- 나는 간단한 충격으로 탑을 무너트렸다. 너무나도 쉽게 나의 비좁은 세계에서 스스로를 살해하는 모습을 구현했는데, 그다지 새로운 느낌은 없었다. 매일 머릿속에서 반복하는 시뮬레이션이 훨씬 더 실감이 나서 그런 걸까. 

 습기는 이불을 뚫고 내려가 이제 침대 시트까지도 죽죽하게 되어 버렸다.


 이미 많은 소를 잃어버렸지. 남들보다 두어 해 늦게 대학을 들어가버리고, 그나마 조금 친해진 듯 한 과 동기와 선배들은 군대를 다녀오자 각자도생의 길로 도망가 버렸다. 아직도 각진 책상에 앉아 시간표에 맞춰 움직이는 삶에 갇혀, 남은 징역형을 보내야 했었고 졸업이라는 명목으로 출소해 나온 세상은 입소하기 전 보다도 더 높은 빌딩과, 더 매캐한 연기로 뒤덮혀있었다. 남들 다 한다는 공무원 시험에 발을 내딛고는 기숙사보다 더 좁은 고시원으로 들어와버리고, 시험에 떨어져 버리고, 자존심도 버리고 희망도 버려가며 지극히 무소유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오게 되어 버렸다. 나의 외양간에는 남아있는 소가 몇 없어 보였다..


 그래도 고쳐야지. 소를 잃고라도 외양간을 고쳐야지. 스스로 우리 속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잠그고, 축생의 땅을 밟는 한이 있더라도 외양간을 고쳐야 다른 소들을 들일 것이 아닌가. 나는 어쩌면 튼튼하지도 않은 우리 안으로 무리하게 소를 몰아 넣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자고 일어나면 매번 허전하던 마음은 바로 그 허술한 외양간 때문이었겠지. 살아간다는 이름 아래서 했던 행위들은 밑빠진 독에 물 붓는, 효용가치가 0으로 수렴하는 무의미함의 반복에 지나지 않았다. 나 스스로가 그렇게 보였다, 축축한 침대 위에 앉아있는 내 모습이, 밑 빠진 인생에 계속해서 알콜을 들이붓는 행위로 비틀려보였다.

 이불을 빨아야지. 그리고 샤워를 해야겠다. 그렇게 하나씩 빠진 밑을 채워넣으면 이 몸뚱아리에 무엇이라도 담아 나아갈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제법 우글거리는 소 우리를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겠지, 아마도? 그래도 난 아직 걷는 힘이 남아 있긴 하니까, 빨리 몸을 일으키고 흥건하게 흘려버린 눈물을 닦아내야겠다. 


 실없게도 미소가 나왔다. 부르튼 입술은 이빨로 몇번 깨물지 않았는데도 빠알간 쇠맛 방울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침대 시트는 어떻게 빨아야되나. 마법이라도 부려 몽땅 깨끗해졌으면 좋겠다. 조용한 방 안에서 웅얼거리며 외쳤다. 수리수리 마수리



*****

ㅠㅠ 정말 오랫만에 찾아오게 되어버렸네요ㅠ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고 한 달 남짓하게 진행된 훈련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ㅠㅠ 모든 문제들이 빨리 해결되었으면 좋겠네요! 수리수리마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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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사는 나비 한 마리가 있었다. 


 그는 다른 나비들처럼 꽃과 꿀을 찾아다니며 향과 색을 탐했다. 그것은 그의 소소한 취미였다. 그가 아무리 일반적인 나비들과 같이 행동하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본능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경계'로 귀소하는 몸짓이다. 그는 낮과 밤의 경계에서 푸르름과 붉음 사이의 빛깔로 몸을 적시길 열망했다, 언제나. 하루 일과를 마친 날, 그는 안과 밖 사이의 담장에 내려앉곤 했다. 나비는 착지하기 전 두 번 날개를 위 아래로 펄럭였는데, 그제서야 비로소 그는 완전히 경계에 안착할 수 있었다. 경계를 찾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영역과 영역 사이의 틈은 언제나 나비를 헷갈리게 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그 미묘함에 이끌렸기에, 언제나 날개를 두 번 펄럭임으로써 경계에 내려앉는 자신의 황홀경을 표현해 내었다. 

 그리고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세상을 알고싶어 여행을 떠났으나 길을 잘못 들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늘과 내일의 경계를 맴돌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다가, 우연히 기다란 담장을 마주했다. 벽에 기대어 쉬려던 그의 앞으로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서는 날개를 두 번 펄럭였다. 청년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들어 연약한 다리를 내려앉게 해 주었다. 또다시 두번의 작은 펄럭임이 손가락 위로 흘러내렸다. 


'귀여운 나비구나' 


청년은 혼잣말로 되뇌었으나, 나비는 그에게 그런 그에게 말을 건넸다. 


"경계에 있는 아이로구나. 나는 경계가 좋아."

"경계라니?" 


청년은 놀라서 되물었다.


"유년과 노년의 경계. 움직임과 멈춤의 경계. 그리고 또다른 무수히 많은 경계에서 방황하고 있구나."


홀연히 나타나서는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나비는 청년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나비가 말을 한다는 가장 비현실적인 모습은 그가 말하는 내용의 기묘함에 묻혀 더 이상 청년을 괴롭히지 않았다. 

 청년은 다시금 물었다. 


"확실히, 내가 맴돌고 있는 건 사실이야. 그리고 그 방황속에서 내가 도대체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 인지 할 수도 없고, 날 혼란스럽게 만드는 여러 직선과 곡선밖에 내 주변에 보이질 않아."


나비는 또다시 두번 펄럭였다. 


"경계란 그런것이다, 확고함과 동시에 유동적이며, 방황하지. 그런 모습은 마치 죽음으로 닿기 전 생의 끝자락을 움켜쥐고 몸부림치는 진동과 같아. 그런 경계의 꿈틀거림이 매혹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방황하는건 매우 괴로운 일인걸. 나는 미래로 나아가고 싶지만, 오늘이라는 감옥에 갇힌 느낌이라고. 어떻게 여기서 나가는지 알 수 있을까?"


청년의 말을 경청하던 그는 여섯 다리를 쭉 펴고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리가 저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앞 두 다리를 번갈아 움직여 보던 그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래, 분명 경계는 벗어날 수 있는 곳이다."


나비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를 청년은 그저 신기하게만 바라보았다. 


"경계란 모든 시작의 시작점이다. 새로운 구간으로의 출발은 언제나 다른 구간과의 접점 그리고 그 경계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당신도 타인과 타인 사이의 열정적인 경계면에서 발현된 결과이고. 하지만 경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기는 힘든 것이야. 경계는 마치 선의 두께같은 것이라, 존재하는 듯 눈 앞에 어른거리지만 손에 쥐려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지. 너는 훗날, 자연스럽게 그 경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나비는 또다시 두번 날개를 움찔였다. 날개에서 떨어져나온 오팔색 가루들이 손가락에 묻어났다. 청년은 담장에 기대있던 등을 일으켜 세웠다. 

 유난히 정적이었던 배경들이 이 일련의 순간들 동안 극렬히 요동쳤다. 오팔색 가루는 이내 피부 밑으로 흡수되고, 혈관을 타고 흘러가, 청년의 심장으로 흘러들어 생명의 힘으로 강하게 박동했다. 그 순간 청년은 형용할 수 없는 시야에 사로잡혔다. 그는 끝없이 이어진 들판을 보며, 한 문장을 입 밖으로 흘러내렸다. 


"저기 보이는 이 땅과 하늘의 경계는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


나비는 대답했다.


"경계는 실재와 비실재 사이에 자리한 것이야. 그런 질문은 경계에 대한 무례한 태도이지."


이번에도 청년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수긍이 가는 나비의 더듬이 짓에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앎과 무지의 사이에서 그렇게, 질문이라는 방향으로 맴돌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구간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는 너가 인지하는 순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표출하는 경계를 마주할 거야. 그때 너는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그것이 너를 경계로부터 날아오르게 해 줄 것이다."


말을 끝마친 나비는 살포시 여섯 발과 두 더듬이를 청년의 손가락에서 떼어내었다. 이내 그 형상은 삶과 죽음의 경계, 실재와 비실재의 경계로 돌아가버렷다. 그 순간은 낮과 밤의 사이, 지평에 해가 뭍혀 잠식당하는, 오늘 하루가 임종을 맞이하는 시간이었다. 

 그곳에서 청년은 기다란 담장의 볼품없는 구석에 돋아난 연약한 새싹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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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고양이라고 거짓말 하지마. 넌 언제나 흰색이었지. 햇빛은 영원히 비치지 않고, 따스한 마루도 식어간단다. 너를 언제나 볼 수는 없었지만, 절대로 생각을 멈출수도 없었지. 각막에 새겨진 잔상이 노랑으로 물들어 갈 뿐이었단다. 푸른빛 별무리가 이주하는 밤, 나에게서 숨 멎은 너의 모습. 그렇게 추락해버린 육신은 비상하는 혼을 떠나보냈단다. 슬퍼하는 풀들이 고개를 숙이고, 배웅의 서풍이 그들을 스쳐지나갈때, 너는 비로소 온전히 나를 마주해주었구나. 항상 기원했던 너의 품 속을 마지막 베개로 삼았다. 수면을 밟고 뒤따라갈게, 기다려주겠니? 비치는 잔상들이 길을 가리고 있다. 마음은 너에게로 달려가지만 일렁이는 탓에 움직이지 못하고. 맴도는 염원은 갇힌 채 방황하고. 숨을 불어넣어주렴, 그 최후의 미소로. 언제나 멀어져만 갔던 그 입가에, 모든 법칙의 인력이 강하게 차단당해버린. 등대 없는 바다에도 그러나, 품을 향하는 선원은 기도한단다. 나의 모든 세상이고, 나의 모든 울림인 너로부터. 점멸하는 기억들이 눈 앞에 길을 자아낸단다. 누벼진 눈꺼풀 사이로 들어온 강렬한 섬광이 나를 날아오르게 만들어. 검푸른 빛이 붉게 물들 때 까지 잠들지 않을것이다. 초록의 평원이 여름을 담고, 휘몰아치는 빗방울을 그려내어. 그 모든것을 남기고 간 멀어진 뒷모습이 수평선 위로 증발해간다. 지평의 끝에 선 채 외칠 수 밖에 없는 무기력이, 그럼에도 좇을 수 없는 편린들이 기억을 찢어버리고. 해체된 모든 시간선 위에서, 직선과 곡선으로 씨앗을 심고는 좌표계 위에 만든 농원. 채 피지 않은 꽃봉오리에 맴도는 향기가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데, 스스로 떠나보내기 전 까지는 사라지지 않을 이 강렬함이. 이렇게 심연의 바닥을 파고 드는 시린 백색을 나에게 남겼구나. 그럼에도 너는 노랑이라고 말했었지. 스러지지 않을 괴로움이, 사라진 너에게 비웃음 당하고 스며드는 시간을 비웃고 있는데. 은과 소금이 솟아나는 우물을 내려다보며 기어코 몸을 던지게 만드네. 정오의 태양이 비추는 때에, 나는 비로소 너의 노랑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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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적인 하루다. 소비되는 모든 감정들이 나를 괴롭게 한다. 중심축이 휘어져버린 연약한 것, 나는 휘청거리며 도로를 걷는다. 자라나면서 자연적으로 비틀린 척추가 신경쓰인다. 스스로 균형잡혀 지기에는 너무 많은 자극에 노출되어 버린걸까. '삐뚤어졌다'라고 자각한 순간, 내 불안증상은 다시금 나를 잡아먹었다. 더욱 익숙해져버린 오른손에 화가 나 왼손으로 밥을 먹고 양치질을 해 보았다. 화장실의 거울상은 비웃듯 자신의 왼손을 능숙히 움직였다. 치우친 나의 모습을 벗어나고자, 밖으로 뛰어 나아가 찾았던 것은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린 편의점의 딸기맛 우유였다. 무의식적으로 제품을 집어든 나의 오른손이 미웠다. 재빨리 왼손으로 반대 선반의 커피땅콩을 낚아챘다,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집으로 돌아와 왼손으로 포장을 뜯고 목구멍에 거칠게 쑤셔박았다. 몸은 익숙한 낯설음으로 내게 반응했다. 그러고 보니 나, 땅콩 알레르기가 있었던가. 어쩌면 커피일지도 모르겠다. 실증나는 이 웃긴 현실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왼손으로. 


 어느 순간 마주한 내 모습이었다. 나는 아마 오래 전 부터 공평함을 잃어버렸던 것이었다. 물살에 휩쓸려, 스스로 어푸어푸하며 물장구 치는 것을 '헤엄'이라 믿고 있었던 것 아닐까. 과연 나의 자유의지는 확고하게 믿을 수 있는 개념인가, 나의 이성으로 선택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늘 먹던 딸기 우유도, 어쩌면 방금 집어든 커피땅콩도 우연히 지나가다 본 3초짜리 영상의 자극에 의해 도출된 결과일 수 있지 않은가. 머릿속 생각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아닌, 세상의 틀에 갇혀 지배당하는. 마리오네트가 스크린 속에서 춤을 추었다. 자의로 움직인다고 확신에 찬 미소를 띈 채. 그 인형의 눈 속에서 나는 나를 들여다보는 나를 보았다. 


 생각 하기도 싫어졌다. 둘러싸고있는 모든 배경들이 나에게 편향성을 쑤셔넣고 있었다. 고함을 치는 청록빛 커튼을 뜯어버리고 실실 쪼개고 있는 사과를 정말 쪼개버렸다. 왼손으로 오른쪽 주머니에 넣었던 스마트 폰을 꺼내 모든 어플리케이션을 하나 하나 지워나아갔다, 너무나도 오래된 낯설음은 휴지통에 담기는 그 순간까지도 나를 향해 소리쳤다. 드디어 나는 이런 시끄러운 고요를 벗어났다고 확신했다. 난장판이 된 작은 방 안에서는 온전히 미소를 띈 불쌍한 개체가 누워있었다.

오른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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