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UT

달빛이 벽면에 추상을 아로새겼다. 연한 빛으로 덧칠된 그것은 차가웠다. 차가운 추상이다. 밤의 고요를 캔버스 삼아 시간은 붓질을 해 대었다. 창틀 너머로 발산된 도시의 불빛이 넘실대었다. 그들은 내 방, 기숙사 벽에서 아주 정적으로, 그러나 변화하고 있었다. 나는 매 시간마다 경외에 젖어 들어갔다. 그 형상은 매 초마다 스스로를 태우면서 스스로를 빚어내었다. 나는 한 없이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릴 즈음에야, 그래도 살고자 하는 이 몸뚱이의 발악에 짧게 노폐물을 내 쉬었다. 날숨이 벽면에 섞여 들어가 달빛으로 반짝였다. 여전히 그것은 대단히 정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였다. 흐릿함 속 심원의 빛이 내 동공을 찢고는 심장에 내리박혔다. 경외 속에서 무심코 돌린 시야 앞에 수십 개의 격자 너머로 쪼개진 우주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 시선은 나를 한 없이 작아지게 했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수만 갈래의 은빛 섬광이 내 인두겁을 태워버릴 것 같았다. 이 신성한 침묵 속에서도 감히 약동하는 나의 맥박이 원망스러웠다. 조용히 나 또한 이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바람구멍이 열렸다 닫히고, 핏줄기가 출렁이며 내는 소리에 나는 결코 정적일 수 없었다. 매 순간 나는 동적으로 끊임없이 타성에 젖어 들어갔다. 나는 결코 벽 속의 마스터 피스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이 인두겁 바깥으로 뚫고 나와 질주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여기 평범한 침대 위에서 누웠다 가끔은 엎드리며 벽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고작 맥동일 뿐이었다. 매 시간 움직이면서 게걸스럽게 수명을 빨아먹으며. 저 정수리 위로 보이는 찬란한 구체는 지구를 억겁동안 휘감고 있을 텐데, 나는 짧게 콩닥거리다 스러질 유기체덩어리였다. 경외감과 허탈함을 동시에 내 쉴 때에도 여전히 나는 시끄럽게 쿵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절대자가 감아놓은 시계태엽이 콩닥, 쿵덕, 콩닥거리며 풀리고 있었다. 이 잔인한 시한폭탄이 너무나도 나를 메스껍게 만들었다. 여전히 눈동자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벽면에서 타오르는 달빛 이상은 내 망막 가득하게 맺혀 있었다. 쓰라리도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내 눈동자에서 새어나온 필멸성이 힘없이 떨어져나갔다. 넓은 침대 시트 위 손톱보다도 작은 얼룩이 생겼다가 거의 말라갔다. 내 존재의 의미 자체도 함께 사그라드는 듯 했다. 나는 끊임없이 저 빛에 닿고 싶어 했다. 언제나 그곳에 있었던 눈동자. 끊임없이 난 팔을 뻗고 헤엄치려 했다. 하지만 이 우주라는 바다의 가장자리조차 벗어나지도 못했다. 또 의미 없는 발악이었다. 헛된 망상으로 30초가량을 허비했다. 31. 32. 33... 그럼에도 저 눈동자는 변함없이 날 내려다 볼 뿐이었다. 나는 심지어 반대편 벽면까지도 닿을 수 없었다. 감히 순간이면 사라져버릴 몸뚱이가, 어찌, 그 이상 절대적일 수 없는 형상을 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조용히 나는 가라앉을 뿐이었다.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해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뻐끔일 뿐이었다. 노폐물이 방울을 타고 흘러나왔다. 보글. 보글. 보글...

 

 

 

이 모든 순간에 나 또한 고정되고 싶다. 모든 호흡과 맥박을 멈추고. 영원히 정적으로, 영원히 날아오를 수 있도록.

*****

너무 오랜만에 글을 다시 올리네요... 이전처럼 도넛이 다시 활성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도넛한 나날들 보내시길 바랍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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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정한 사랑이라
믿었다. 기다리고 기다리겠다고, 그 날
넘치는 슬픔에 쓴 20여 편의 시는
맹목적으로 그녀를 사랑한다,
말하고 있었다.
사랑의 이유와 목적을
겨울에게, 밤에게, 호수에게 물었다.
그 날 처음 낯선 사랑과 마주한
소년은 사랑이 영원할 거라 믿었다.

2.
첫사랑은 봄
따스한 날씨에 외투를 벗었다가
꽃샘추위에 다시
몸을 감싸듯
사랑이란 아름다운 망상임을
깨닫고 나를 당신에게서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게 만드는 계절:

저기요, 내사랑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은 건
착각이었나요.
그 착각이 없었다면 이 시와
지금 이렇게 추억을 떠올리는

어린 아이가 있었을까요?

3.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그대도 이미
알고 있었을까

착각으로 빚은 내 사랑.

2015. 6. 7~2015. 6. 8

설향을 위한 시 / 윤이명

 나무가 손짓했다. 안녕, 하고.
 여름날의 정오 부근이었다. 태양은 익숙하게 나를 태우려고 째려보고, 나는 한껏 선크림을 바른 얼굴을 들이밀며 기싸움을 했다. 물론 나는 질 걸 예상하고는 모른 척 나무 그늘로 들어갔다. 그때가 처음으로, 다른 종으로부터의 전언을 들었던 순간이었다. 

그저 흔들거림이었다, 처음에는.

안녕.

그저 그림자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잘지내니.

잎새가 그늘을 따라 나를 쓰다듬는 듯 했다.

보고싶어, 보고싶어서 올려다 본 하늘에는 네가 자리했다.

안녕.


 너는 살랑거림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몸짓을 자아내고 있었다. 너의 그늘 속에서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여름의 한 가운데 곧게 서서, 나는 그 어느때보다 따듯한 찰나를 맞이했다. 당신은 최소한의 몸짓으로 세상을 담아내었다. 당신이 스르륵 움직인 그 순간, 여러 갈래로 쪼개진 파아란 하늘이 나에게 담겼다. 그 무언의 언어로 나는 당신의 상냥함을 이해했다, 안녕. 그렇게 무한한 순간을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았다. 당신이 내려준 친절은 어느새 멀리 흩어지고 있었다. 다시금 올려본 하늘에는 성난 얼굴로 날 노려보는 성가신 동그라미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한 발짝 옆으로 몸을 옮겨 그와 상종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여전히 당신은 나를 위해 기꺼이 따듯한 시원함을 나려주었다.
 그렇다, 당신은 한 없이 자연스러웠다. 그 고정된 몸체에서 뿜어져나오는, 나비의 날갯짓과 같은 흔들거림이 모든 존재의 본질적 고립됨을 뚫고 울려퍼져갔다. 당신의 말단부는 끊임없이 동적이었지만 중심은 단단히 정적이었다. 토지를 있는 힘껏 움켜쥔 당신의 뿌리가, 중력을 딛고 일어나 고개를 치켜드는 당신의 몸체가 너무나도 경이로워- 나는 다시금 마침 없는 정지에 머물렀다. 나는 당신과 닮아갔으나, 태양에 밀려버린 그늘을 따라 자꾸만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무심한듯 여리게 바라보는 당신은 이상적으로 자연스러웠다, 아니, 자연 그 자체였다 - 당신은 스스로 그러했다.

 그런 것이었구나. 흘러가는 모든 것들은 변할 수 밖에 없구나. 당신은 그 작은 살랑임 하나로 나에게 수 많은 생각을 불어넣어주었다. 당신의 잎사귀가 속삭이고 지저귀었다. 모체에게서 떨어져 나온 순간, 그 순간에 일생에서 가장 강렬한 표류를 경험한 후, 당신은 떡잎을 피워낸 곳에서 거목이 되었다. 세포단위에서까지도 단단한 벽으로 불변성을 결집하는 당신은 나와 본질부터 달랐다.
 나는, 매 시간 한 발짝 옆으로 움직여야 하는, 그러한 존재였다. 내가 이렇게 의미없는 수평이동을 할 동안, 당신은 조금이라도 더 창공에 닿으려 세상을 향해 몸을 일으키겠지. 단단한 껍질에 포개어진 무궁한 초록은 곧 온 풍경을 향해 뻗어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손짓에 세상은 일렁이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러한 일렁임에 몸을 싣고, 당신의 일렁임을 향해 매 시간 한 발짝씩 옆으로 이동할 것이다. 내 발걸음은 당신의 손짓처럼 세상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내뿜는 깊은 울림은, 그 만큼이나 깊은 뿌리에서, 뽑아올려진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리도 나약하고 물렁한 살덩이라니. 당신은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허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손바닥을 대어 당신을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다른 한 손으로 나를 더듬어 보았다. 당신이 더 높게만 느껴졌다. 내가 스러져 가는 순간에도 끝 없이 하늘과 닿아갈 당신이 보였다. 나의 발은 뿌리가 아니어서 끝 없이 움직여야 함이 가장 강한 슬픔으로 나를 적셨다. 내 생의 모든 움직임을 굳혀 단단한 반석을 세운다면, 당신을 마주보며 최후를 같이할 수 있을까. 수 만번 해와 달이 돌고 지평에서 휘감기는 시간이 나를 갈기갈기 찢지 않을까. 이루어지지 않을 망상에 취한 내 모습이 한심하여, 나는 생각하기를 그만하고 발자국을 몇개 더 만들어내었다. 멀리서 바라본 당신은 사르륵거렸다. 사르륵, 사르륵.
 
 나는 그렇다면 당신의 양분이 되어야겠다. 고마웠어. 네가 조금이라도 더 하늘을 뚫고 올랐으면 한다. 내 살덩이와 푸석한 뼛가루가 당신의 혈관을 타고 올라가, 당신의 순간 순간에 베여있는 움직임이 되었으면 한다. 변함없이 서 있으며 산들거리는 당신을 뒤로 하고, 나는 몇개의 풀잎을 밟으며 돌아간다, 움직일 수 있으면 가야만 하는 곳으로. 세상은 나에게 당신만큼이나 큰 그림자를 허락하지 않았나 보다. 함께 있었을때 합쳐졌던 암녹색 거대한 그늘, 그 속에서 빠져나온 내 그림자는 많이 야위어 보였다. 이렇게 볼품없음에도 그러나, 당신은, 내 그림자 안에 당신의 따스함을 담아 나에게 보내었다.

 초록 내음이 발목을 타고 나를 적셔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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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품은 나는 더러운 강물이었다.
온갖 썩은 단어들, 그 사이로 떠오르는 준비했던 이야기가
더는 당신에게 중요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당신에게 붙어서 더욱 끌어안고 싶어졌다.

그런 내게 당신은 바다 같은 사람 
알 수 없는 그대 마음 품을수록 나를 더 맑게 하니
하루종일 당신의 둘레를 맴돌다가, 

시를 쓴다.
오늘밤 당신은 내게 새로운 사랑을 가르쳐주네.

160528 PM 4:41

3연 2행의 문장을 맥거핀처럼 좀더 멋있고 시선을 끌 수 있도록 표현하고 싶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고민하지 않고 있다가 그냥 올립니다...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사라지지 않고 

그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160528 진실.

* 어떤 생각 혹은 기억은 도망치려고 외면하려고 해도 사라지지 않고 자꾸만 떠오르는데, 그럴 때마다 그것들은 더욱 진실이 되어 더욱 단단해진다... 마치 호숫가를 걸어가도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시도 그렇고 교육에 대한 꿈도 그렇고. 그래서인지 그것들이 내 안의 진실인 듯싶다.  

** 듯: (관형어) + 의존명사, (어간) +연결어미
*** 듯하다/듯 하다: 듯하다('-하는 것 같다'처럼 추측의 의미), 듯 하다('-하는 것과 비슷하다'처럼 비슷하다는 의미)



앓음답게 앓은 알음은 아름다운 앓음, 알음다운 알음, 아름다운 알음, 앓음답게 아름다운 알음..


ㅡ시인 아닌 이가 시인하던 것 하고 있음을 시인하지 아니하며 토해내었다  



 꿈을 꾸었다. 여름이 스며드는 창가 아래로, 너는 잠을 자고 있었다. 햇빛이 너의 얼굴에 내려앉고 있었다.  네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지 않아. 나는 살짝 너의 이마에 키스했다. 너는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숨 막히도록 정적인 네 새근거림이 나를 경직시켰다. 비참하도록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입술에서는 쓰디 쓴 흙 맛이 묻어났다.

 기어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구나. 절대로, 절대로 기억하지 말자 수없이 다짐했지만. 눈꺼풀이 내려앉고 몸이 가라앉으면 여전히 나는 그 여름에 갇혀있었다. 너는 변함 없이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너는 네 숨소리와 심장 박동으로 교향곡을 자아내었다. 흘러가는 악곡의 마디마디가 뻗어나와 내 목을 조르는 듯 했다. 너의 존재만으로 나는 질식하기 충분했다.

 나는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의 시신은 내가 수습할 것이다. 그리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내 체온으로 너는 영원히 따듯해지고, 네 형상으로 나는 영원히 행복해 질 것이다. 너에게서 스며나온 여름이 날 적시겠지. 그렇다면 널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텐데, 오롯이 나 혼자서만.

 그렇게 내 안 몇 안되는 양지바른 기억에 널 넣어두었다. 너는 아직도 잠을 자고 있었다. 네 주위 휘몰아치는 음표들이 나의 접근을 차단했다. 온 몸이 불타오르는 듯 했다-너를 떠올리기만 해도. 네 기억은 붉게 달궈진 세뇨 문양의 인두로 내 눈동자를 지졌다. 그와 동시에 너의 형상이 내 각막에 흡착되었다. 너를 잊으려 눈을 감았지만, 너는 보란듯이 그 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눈이 아렸다. 눈물은 세뇨를 씻어내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끝나지 않는 여름 속에 갇혀버렸다. 나의 삶 속 모든 여백에는 네가 아지랑이처럼 서려있었다. 너의 숨소리가 닿은 곳 마다 D와 S가 아른거렸고, 무의식적으로 내 뻗은 손은 나를 다시 너의 곁으로 이끌었다. 또 다시 갇혀버렸다.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너에게 가까이 있었지만, 그 마지막 한 발자국을 다가가지 못했다. 나와 너 사이에는 억겁의 시간이 놓여있었고, 무한의 후회와 회한으로 쌓인 장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변함없이, 너는 자고 있었다.

 

 너의 잔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햇빛은 너의 수의가 되어있었다. 너를 입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너의 무덤 위에는 풀잎들이 제법 길게 돋아나 있었다. 그들의 여린 살랑거림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내 아픔에서 새어나온 고통을 마시고, 그 들은 한 뼘 더 몸을 뻗어나아갔다. 웃기지. 너의 존재만으로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행복이었고, 하지만 닿지 못하였기에 슬픔이었다. 너는 이제 나에게 아픔이었다. 나를 맴돌게 하는 수레바퀴다. 네가 울려낸 선율은 끝없이 세뇨와 달 세뇨 사이를 반복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지만 너는 내 삶속 어디에나 위치했다. 슬프도록 찬란하게 빛나면서.

 

 오랫동안 찾지 않았었다. 어느새 너는 잡초가 무성한 버려진 봉분이 되어있었다. 한동안 나는 너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너를 향해 발자국을 내었다. 풀숲을 헤치고는 거친 자리에 살짝 입맞춤 했다. 너는 미동하지 않았다. 아름답도록 비참한 풍경이었다. 찬란하도록 슬픈 풍경이었다. 긴 시간 서로에게 속박된 우리는 나란히 불행했다. 끊임없이 나는 너를 묻었고, 너는 끊임없이 나를 질식시켰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비로소 나는 피네를 그려내었다.

 나는 너를 잊을거야. 영원히. 그 여름도, 그 창가도, 너에게 나린 햇빛 한줄기 한줄기마저도. 그리고 너를 기억했던 수 많은 순간들 또한 지워나아갈거야. 그렇게 한다면 마침내 서로가 자유로워지겠지. 나는 여전히 걷지만 너는 마침내 날아갈 수 있을거야. 부디 저 창공위로 떠나가거라. 우주에서 유영하는 커다란 고래가 되어.

 나는 너를 다듬었다. 너는 다시금 싱그러워졌다. 여름날, 그 창가에서 새근거리던 너의 기억이 선명해지면서 옅어졌다. 순식간에 너는 나를 떠나갔다. 얼룩진 각막위로 흐른 마지막 눈물은 그렇게 널 깨끗이 닦아내었다. 무엇이 널 이리도 오래도록 붙잡아 놓은 것인지. 널 보낸 하늘 위로 구름이 장대비를 토해내었다. 온 몸이 너를 보내는 마음으로 적셔졌다. 그토록 바랬지만 바라지 않았던 순간에, 세상이 나를 대신해서 울어주었다.

 

 비가 끝나면 가을이 오겠지. 너는 어딘가에서 또 잠을 잘 것이다. 언젠가는 나도 너를 그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여름은 이미 사라져버렸는걸. 다시 만날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다. 햇빛이 건널목에서 흔들거렸다. 길을 건너며, 잠깐 너를 기억했었는지도 모른다. 너는 아마,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너를 흔들어 깨웠다.

 

 

 

 그때, 영겁의 시간동안 보고 싶었던 너의 여름빛 눈동자가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에게 안녕, 하고 작게 속삭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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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막이 아릴 정도로, 모든 것이 환하게 투영되는 시간이 있다. 눈을 감으면 아름다운 선율이 들려오고, 초여름 저녁의 안락함이 바람에 섞여 폐에 가득 차오른다. 곁에는 청록의 푸름을 지닌 사람들이 풍경에 섞여 덧칠되고, 손에 들린 달콤한 오팔색 미약이 입 안을 적신다.
 그때 우리는 알아챈다. 이것은 영원히 기억될 순간이구나. 후에 숨이 찰 때, 넘어져 무릎이 까지고, 옆에는 같이 울어줄 사람 하나 없는 서러운 때에, 가슴 깁숙한 곳에서 피어올라 나를 포근히 덮어줄. 오감이 행복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고, 외부의 고통과 단절되어 깊은 숨 내올 수 있는 청명한 때. 이 때를 기억하며 세상에게 긁혀온 모든 상처를 다독이게 될 것이다.
 삶을 관통하여 흘러갈 치유의 순간이다. 본인에게 주어진 행복의 덩어리 조각이 담길 구간이다. 우리는 이 벌판을 지나면서 무한회귀를 지향하며, 생의 지평에는 쓴 열매와 독초가 산재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망각시킨다. 인생이 이와 같이 장및빛이었다면. 환희로운 풍경에 실려 이대로 항해할 수 만 있다면. 우리는 불가능한 가정법에 마취되어 문장 하나, 공상 하나씩을 탐닉하게 된다.
 이러한 구간에는 힘이 있어, 스스로 나아가는 그 어떤 방향이라도 질주할 에너지를 실어준다. 빛나게 해 준다. 추락하듯 날아오르게 해 준다. 의식하지 않고 있다 보면, 어느새 능선 넘어로 흘러가버린 금빛 풍경을 안타까이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꽉 붙잡고 흔들어도 언젠가는 놓아야 될 별빛임을 알기에, 그 빛이 하늘로 휘날려 유성우가 되도록, 밤 하늘을 영원히 비추도록 우리는 보내 주어야 한다.
 그리곤 기억해야 한다. 이리도 아름다운 순간에 당신은 존재했었다고. 당신은 그 풍경에 녹아있었다고. 그곳에서 흘러가는 모든 것들과 포옹하고, 노래하며 금빛 세상을 자아냈다고 말이다. 시간의 파도에 휩쓸려 가라앉은,  잊혀진 대륙처럼 되지 않도록.

 오르막길을 오르는 모든 고행자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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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 본 적 있어요? 그 감정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으면 허무해지죠."
-허영만, <커피 한잔 할까요?> 4권 중

아카시아 꽃향기
함께 바라볼 사람
쭈르륵 비가 내려 흩어져도
함께 추억해줄 사람

그런 마음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너 지금
여자 친구가 필요해.  

170509 PM 8:07

- 얼마 전에 친구가 제게 부탁하더라고요. 시를 써달라고.

“산책을 하다가 아카시아 꽃향기를 맡았는데, 기분이 참 좋았어. 그런데 갑자기 비가 오는 거야. 쭈르륵, 향기가 흩어져버렸어. 이 느낌을 시로 써줄 수 있어?”

공책과 펜을 하나씩 들고 호숫가에서 시상을 정리하기로 했어요. 그러면서 감정이입해봤습니다.

“그 순간 그는 왜 서정적인 감정을 느꼈을까?”

그 순간이 그냥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허무함 때문일까요,
미리 더 바라봐 둘 걸, 하는 아쉬움 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일까요.

혼란을 느끼던 차에 떠오르는 대로 즉흥적으로 시를 썼습니다. 너 홀로 산책.

부제: 부모님을 위한 시

- 어버이날 선물로 아무것도 드리지 못했다. 꽃과 와인을 선물하려 했지만 내 게으름과 더불어 우유부단함 때문에 결국 5월 8일을 그냥 흘려보냈다.
- 문득 생각했다. 편지를 드리자고. 왠지는 모르겠는데 편지를 써야겠다, 생각했다. 시의 형식을 빌려서. 그리고 5월 8일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 한마디를 부모님께 적어서라도 드리고 싶었다. 사랑해, 라고.
    
엄마, 우리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엄마.
최근 한 달을 돌이켜보니 꽤나 큼직한 사건들로 가득했던 것 같아.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나는 수류탄을 던지고, 사격과 행군도 하면서
어느새 수료를 했고, 그 시간의 감옥 같던 곳에서 탈출하니
기관장과 사이가 멀어져 하루하루 갈등과 불안 속에서 지냈고,
이 와중에 아빠가 갑자기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에 오만가지 생각을 했던 한편,
허무감과 엄마 걱정으로 초조한 순간을 보냈으니까.
정말로 매순간이 나를 새로움보다는 난감한 감정과 생각으로 데려갔어.
그리고 정말로 믿겨지지 않아. 그토록 다사다난했는데,
불과 14일 전이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된다니.
    
엄마, 그리고 우리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빠
그 14일 동안 아들은 스스로 이런 질문을 했어.
“주호야 너는 어떤 어른이 될래?”
훈련소에서는 참는 법을 배웠고,
기관장에게서는 반면교사하며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웠고,
아빠 엄마로부터는 매순간의 소중함과 책임진다는 걸 배웠는데,
문득 이런 생각을 했어.
‘앞으로 내가 그런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 외롭고 쓸쓸하겠다.’

그런데   
내가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었던 엄마, 아빠
그래서 나보다 오랜 시간 외롭고 쓸쓸했을 우리 엄마, 아빠
어린 시절에 가족 간 대화가 별로 없었기 때문일까.
매번 말은 못하고 글로써밖에 표현 못하는 아들이지만
    
언제나 존중하고 사랑해.
    
170509 AM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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