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UT

J, 지나간 여름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활자를 고르던 얇은 손가락을 조금 떠올려주길, 그 뿐입니다 단어가 단어를 좇을 때 손가락은 손목을 낳을 테니까요

당신이 몇 분이고 응시했던 손목의 흉터 나는 곡해하지 말라고 한참을 말했었죠 소매가 넓은 여름의 블라우스나 분홍 알러지 자국을 골몰합니까 국밥을 말다 토라진 얼굴선이나 곰젤리를 오물거렸던 입술의 잔주름 그러다 나눠 마셨던 편의점 칵테일이나 일요일 오후의 김빠진 말장난도 함께 누웠던 다락의 낮은 천장도 떠올립니까 고양이 울음과 연약한 바다 소리가 밀려올 테고 깨진 소라를 줍던 왼쪽 팔목 갈색 점이 기억나겠죠 걱정 말아요 신발 끈을 묶는 법은 익힌지 오래입니다 혼자서도 보라빛 계단을 연습하고 장마철의 채도를 견디어 갑니다 알아요, 나는 활자를 조금 영악한 방법으로 사랑하는 것 단지 그 뿐입니다 연필을 꾹꾹 눌러 검은 흑연이 미끄러질 때 손가락이 손목을 낳고 손목이 어깨를 낳는 것처럼

점과 점이 선이 되고 선과 선이 면이 될 때 면과 면의 틈새에 기억이 번지면 팽창한 고요는 어느새 나의 부피가 되고 당신은 마지막 심부름을 떠난 아이처럼 내게 도달하겠지요 J, 지나간 여름을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요 나는 멀찌감치 발각되길 바라는 것인지 모릅니다 당신이 글을 적는 나의 손을 떠올리면요 지난다는 말은 믿지 말아요 엉망이 된 시제를 즐기는 나는 불온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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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에 한 번 배가 드나든다는 바닷가 마을
손가락 사이로 어머니가 빠져나간다
하루에도 몇 번 집을 나가고
기저귀에 똥을 누는 그녀는
지도를 읽는 법을 잃었다고 한다

가장 복잡한 별자리를 두 발로 그리던
어깨가 허름한 나의 지도에는
빗금이 많았다
외출을 금지당한 죄수 둘은
익숙한 지명을 손톱으로 긁어냈다
붉은 딱지 수어개가 떨어져 나갔다
라이터와 소시지 두 개로
형벌의 크기를 견주었다
달에 발자국을 새길 옆방 죄수의 이야기
아침이면 떠날 것이라고 했다
남극엔 아직 녹지 않은 얼음이 있다

장소에 사람을 새기다 지도의 절반을 침범당한 적

눅눅한 자기위로에
돌아서며
어머니가
이 안타까운 것,
다만 다리가 없어서라는 것을
그렇게 몰랐던

수많은 끈과 끊-사이에서
이미 사라진 두 다릴 연신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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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음을 연주하고 있어서 함께인 줄 알았지. 우리 서로 다른 옥타브 위를 걷는다는 걸, 그게 헤어짐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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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에서 비롯된 참사

지상의 동사에 밀착한 아이는 시인이 되지 못했고
형용사의 풍광에 매혹돼 길들여지지 못했다

첫 숨을 운 산부인과를 걸었다
복도 양 모서리는 늘어선 하얀 군단에
하얀 군단은 늙은이의 주례에
솜털이 돋아난 몸을 기울이길 수어번
낡은 가운 속 카페인 몇 그람 넣어준 말대가리 동료
이미 죽어 세상에 없다

주의 절반을 카페인으로 지새운 의사는
아이의 탯줄을 엉뚱하게 잘랐다고 했다
어색하게 매듭진 배꼽 줄기 위로
태생 같은 불효가 스며들었다

아이의 머리칼이 허리와 목선을 다섯 번 왕복했을 때
위태로운 발목은 늘 긴장해 있었다
매끈한 왼 무릎과 멍이 든 오른 무릎 사이로
몇 차례의 불륜이 다녀갔다
규칙적으로 변덕을 부리는 그늘의 팔목
네모진 교과서를 이탈한 활자는 만실의 여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얌전히 재단된 상징 곁에
불(不)과 비(非)를 사랑한 건 필연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한 곳에 흰머리를 버리고
은퇴를 모르는 선수의 응원가는
과거의 미지근한 영예를 틀니처럼 갈아꼈다
자동문은 늘 아이 앞에서 닫혔고
문은 언제나 정직했다
모체와의 결별이 남긴 동심원의 문양
씹다만 활자의 부스러기가
어색하게 부푼 아랫배 위로
몰래 훔친 계절처럼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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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편지, 나흘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혹 미신이라 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불쌍한 당신,

 

당신은 나를 보고 소리를 질렀지요. 뭉크는 활로 목젖을 여덟 번 긁어 괴성을 뱉었어요. 공포인가요, 경의인가요. 나는 기계로 반죽한 회색 물감과 린시드 용제 그리고 바니스를 덧발라 탄생한 명작인데요, 아스팔트에 유채, 2016년 작입니다.

 

내 하품 소리는 옥타브가 달라요. 불행하게도 당신은 구태여 듣고야 말았네요. 허공에 누워 아침잠을 꼬박 두 번 자는 병은 꽤나 전염성이 강합니다. 아스팔트 위에 터진 내장을 전시할 운명을 대부분의 보행자는 알고 있지요. 내닫는 바퀴에 끼어 물렁한 살덩이를 사방으로 페인팅하는 행위 예술가. 장래희망이 아닌 팔자소관이지요.

 

과잉된 것은 구멍을 통해 흐르는 법입니다. 억지웃음과 보조개, 야욕과 뚝뚝 흐르는 정액, 과대망상과 목구멍의 허언, 불필요한 동정과 맛없는 콧물 같은 것들 말입니다. ,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요, 한강 물의 온도를 재보았다면서요. 당신 몸의 구멍을 바라보세요. 흘러내리는 것을 팔아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섹스도 할 수 있어요. 구멍은 생명이에요. 치즈에 구멍을 내는 것은 요령껏 게으른 생쥐의 앞니랍니다.

 

나의 항문에선 암 덩이 같은 권태가 장맛비처럼 쏟아져 내려요. 목숨의 부분 집합이요 생명의 은사지요. 듬성듬성한 머리를 보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날개는 영업을 철수했거든요. 당신이 불안에 떠는 이유를 알아요. 나에게서 당신 죽을 날짜를 받아갔잖아요. 미리 점을 치는 것은 반칙이에요. 나를 지하철 보관함에 넣어주세요. 나는 당신의 미래니까요.

 

비둘기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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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 때문에 그런지 유독 도서관에 사람이 적다. 익숙한 낯이 보이지 않는다. 선생님은 변호사 시험 때문이라고 했다. 어제 강의실에 아끼는 털목도리를 두고 왔다. 목은 늘 허전했으니까, 달라진 것은 없다.

오두막 비슷한 곳에서 난로 주위에 앉아 책을 읽는 상상을 한다. 서가에 꽂힌 책들에 과연 몇 명의 지문이 묻어 있을지 생각했다. 장갑을 벗어 몇번이나 자국을 남겨보았다. 겨울은 유독 온갖 종류의 상상을 하게 되는 계절이다. 대개는 우스꽝스러운 것들이었다. 기한이 만료된 쿠폰이나 꿀이 말라 붙은 호떡 종이를 자꾸만 발견했고, 나는 그것이 겨울 옷에 주머니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스무 한 살 이후에는 서쪽 편에서 살아왔다. 서부 간선도로 표지판을 볼 때면 늘 세상의 끝 같다고 느꼈다. 나는 양수도 음수도 아닌 것이 그러니까 방향성이 없었지만, 그 앞에선 끝없이 걸어가다 추락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던 것이다. 눅진 감정과 누덕누덕한 관계와 누적된 거리, 니은이 주는 감정은 너무도 가난했다. 바삭 마른 겨울의 기분이었다.

어제 저녁으로 아빠와 중국요리를 먹었다.
목은 늘 허전했지만, 그래도 목도리를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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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인형이 있는 방


나의, 붉은, 마트료시카―

인형 선물에 가슴 뛸 나이는 지난 지 한참이에요. 사실 베개를 빼앗길까 두려웠어요. 흰 블라우스에 점퍼스커트 절개선은 허리 위쪽이에요. 러시아어 사전은 가지고 있지 않아요.

마음을 울리는 것은 늘 곡선이죠. 눈물에도 곡률이 있어요. 당신 울음이 활강을 알았다면 구태여 만나지 않았다고요, 광대 위로 굽이치는 곡선에 오금을 놓치고 말았어요. 굽은 것은 방향을 전환할 줄 알아요.

마지막 마트료시카는 어디 숨었나요. 고르지 않은 것은 심장의 박동이죠, 고르지 못한 것은 삶의 결이에요. 미완의 선택지엔 울퉁불퉁한 후회가 남죠. 맞은편 골짜기엔 판도라의 상자가 퇴적을 거듭해요.

인형은 인형을 안아요. 붉은 사라판을 쓴 적 있어요. 앞치마엔 아직도 꽃다발이 자란다고요, 허리는 늘 곡선을 유지할 줄 알죠. 부활절 달걀은 정교한 세공을 거쳐요. 강보에 싸인 아기를 부끄러워 말아줘요, 조금 서툰 알파벳으로 뚜껑을 열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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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사람의 신체 구조에 대해 생각하는데,
하필 왜 눈은 앞에 달려 있어 스스로의 등조차 온전히 바라볼 수 없게 하는지 고민하는 일은 과연 시간을 죽이기 좋은 것이었다.

업고 있는 점의 갯수를, 어긋난 날개뼈의 모양새를 알지 못한다. 등 위로 뻗은 흉터 위론 나의 가파른 토로만을 늘어  놓았을 뿐, 어떤 시선도 준 적 없었다(줄 수 없었다). 이따금 손을 휘휘 저어 브래지어를 채울 뿐, 나는 오로지 꿈 속에서만 그것들을 온전히 응시할 뿐이었다. 기억을 거스를 때 쯤, 엄마가 작은 등의 한 편을 닦아 주었던 것을 보았다.
 
머리칼이 어깨와 등을 몇 번 왕복할 때 쯤, 나는 나의 등을 지배할 수 있다는 환상에 자로잡혔다. 그것은 완전한 오만이었다. 닿지 않는 폭은 점점 넓어져만 갔고, 나는 나의 뒷모습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단지 나를 좋아해주는 몇몇 사람만이 내 등의 굴곡과 점과 흉터의 자리를 알아줄 뿐이었다. 누구나의 등은 그렇게 외롭다.

등을 취한다는 것이야 말로 온전한 사랑의 방증이 될 수 있다. 나는 당신과 온전하고 싶어, 등을 새겨둔 적이 많았다. 친밀하지 않는 이는 지나가는 얼굴이 전부가 됐지만, 단어를 함께 나눈 이의 돌아 누운 등, 그것의 환영은 그리도 선명하게 남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취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동세는 뒤에서 누군가를 꽉 끌어 안는 것이라고 믿는다. 시선의 방향이 같다.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서로의 표정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정직한 등이 놓인다. 나는 우리의 눈이 스스로의 등을 볼 수 없는 구조로 짜인 덕에 세상이 조금 더 따뜻하다고 휴머니즘적인 결론을 내렸다. 말도 안되니까, 이제 등을 붙이고 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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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오래된 습관이 하나 있다면, 누가 너무 미워질 때 그 이의 손톱을 본다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가장 애처로운 부위가 있다면 손톱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재워주고 싶은 손톱이 많았습니다. 많이 화려하게 치장한 그것부터 바짝 파고든 모양새, 견디기 싫어했을 거스러미까지 죄다 어딘가 모자라 보였거든요. 깜찍한 비누 향이 나는 것도 같았고, 살짝 불어 있는 가장자리에 아이 젖내가 남은 것도 같았습니다. 마치 당신 유년의 지도를 쥐고 있는 냥.

그러니까,

당신의 손톱은 한 시간 전에도 당신 손 끝에 있었고, 당신이 사랑을 할 때에도, 바삭 만두를 집을 때에도, 가장 윗 단추를 잠글 때에도, 당신이 기타 연주를 할 때에도, 책장을 넘길 때에도, 나의 볼에 손을 올릴 때에도, 입안에 낀 음식물을 몰래 뺄 때에도, 피아노를 칠 때에도, 당신이 이불 속에서 몰래 부끄러운 일을 할 때에도, 벽돌을 옮길 때에도, 내게 편지를 쓸 때에도, 당신이 태어난 직후에도 늘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나는 너를. 손톱만큼도. -않는 다는 말이 그렇게 서늘하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굳이 사랑과 같은 부피가 아니더라도요) 그냥, 추석에 달을 보다가, 추석에 뜨는 달은 꼭 꽉 차야 할까, 칠하다 만 손톱을 상상하다가, 칠하지 못한 것은 손톱 뿐이 아닌데, 미워하였던 많은 이가 생각나서. 항상 손톱을 네모 넓적이 잘랐던. 나는 많은 이를 속이기 위해 네일 아트를 받아야겠습니다. 손톱 달이 뜨기 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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