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적뒤적이다 꺼낸 일기
당신이 몇 분이고 응시했던 손목의 흉터 나는 곡해하지 말라고 한참을 말했었죠 소매가 넓은 여름의 블라우스나 분홍 알러지 자국을 골몰합니까 국밥을 말다 토라진 얼굴선이나 곰젤리를 오물거렸던 입술의 잔주름 그러다 나눠 마셨던 편의점 칵테일이나 일요일 오후의 김빠진 말장난도 함께 누웠던 다락의 낮은 천장도 떠올립니까 고양이 울음과 연약한 바다 소리가 밀려올 테고 깨진 소라를 줍던 왼쪽 팔목 갈색 점이 기억나겠죠 걱정 말아요 신발 끈을 묶는 법은 익힌지 오래입니다 혼자서도 보라빛 계단을 연습하고 장마철의 채도를 견디어 갑니다 알아요, 나는 활자를 조금 영악한 방법으로 사랑하는 것 단지 그 뿐입니다 연필을 꾹꾹 눌러 검은 흑연이 미끄러질 때 손가락이 손목을 낳고 손목이 어깨를 낳는 것처럼
점과 점이 선이 되고 선과 선이 면이 될 때 면과 면의 틈새에 기억이 번지면 팽창한 고요는 어느새 나의 부피가 되고 당신은 마지막 심부름을 떠난 아이처럼 내게 도달하겠지요 J, 지나간 여름을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요 나는 멀찌감치 발각되길 바라는 것인지 모릅니다 당신이 글을 적는 나의 손을 떠올리면요 지난다는 말은 믿지 말아요 엉망이 된 시제를 즐기는 나는 불온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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