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UT


1.
진정한 사랑이라
믿었다. 기다리고 기다리겠다고, 그 날
넘치는 슬픔에 쓴 20여 편의 시는
맹목적으로 그녀를 사랑한다,
말하고 있었다.
사랑의 이유와 목적을
겨울에게, 밤에게, 호수에게 물었다.
그 날 처음 낯선 사랑과 마주한
소년은 사랑이 영원할 거라 믿었다.

2.
첫사랑은 봄
따스한 날씨에 외투를 벗었다가
꽃샘추위에 다시
몸을 감싸듯
사랑이란 아름다운 망상임을
깨닫고 나를 당신에게서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게 만드는 계절:

저기요, 내사랑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은 건
착각이었나요.
그 착각이 없었다면 이 시와
지금 이렇게 추억을 떠올리는

어린 아이가 있었을까요?

3.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그대도 이미
알고 있었을까

착각으로 빚은 내 사랑.

2015. 6. 7~2015. 6. 8

설향을 위한 시 / 윤이명

당신을 품은 나는 더러운 강물이었다.
온갖 썩은 단어들, 그 사이로 떠오르는 준비했던 이야기가
더는 당신에게 중요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당신에게 붙어서 더욱 끌어안고 싶어졌다.

그런 내게 당신은 바다 같은 사람 
알 수 없는 그대 마음 품을수록 나를 더 맑게 하니
하루종일 당신의 둘레를 맴돌다가, 

시를 쓴다.
오늘밤 당신은 내게 새로운 사랑을 가르쳐주네.

160528 PM 4:41

3연 2행의 문장을 맥거핀처럼 좀더 멋있고 시선을 끌 수 있도록 표현하고 싶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고민하지 않고 있다가 그냥 올립니다...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사라지지 않고 

그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160528 진실.

* 어떤 생각 혹은 기억은 도망치려고 외면하려고 해도 사라지지 않고 자꾸만 떠오르는데, 그럴 때마다 그것들은 더욱 진실이 되어 더욱 단단해진다... 마치 호숫가를 걸어가도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시도 그렇고 교육에 대한 꿈도 그렇고. 그래서인지 그것들이 내 안의 진실인 듯싶다.  

** 듯: (관형어) + 의존명사, (어간) +연결어미
*** 듯하다/듯 하다: 듯하다('-하는 것 같다'처럼 추측의 의미), 듯 하다('-하는 것과 비슷하다'처럼 비슷하다는 의미)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 본 적 있어요? 그 감정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으면 허무해지죠."
-허영만, <커피 한잔 할까요?> 4권 중

아카시아 꽃향기
함께 바라볼 사람
쭈르륵 비가 내려 흩어져도
함께 추억해줄 사람

그런 마음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너 지금
여자 친구가 필요해.  

170509 PM 8:07

- 얼마 전에 친구가 제게 부탁하더라고요. 시를 써달라고.

“산책을 하다가 아카시아 꽃향기를 맡았는데, 기분이 참 좋았어. 그런데 갑자기 비가 오는 거야. 쭈르륵, 향기가 흩어져버렸어. 이 느낌을 시로 써줄 수 있어?”

공책과 펜을 하나씩 들고 호숫가에서 시상을 정리하기로 했어요. 그러면서 감정이입해봤습니다.

“그 순간 그는 왜 서정적인 감정을 느꼈을까?”

그 순간이 그냥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허무함 때문일까요,
미리 더 바라봐 둘 걸, 하는 아쉬움 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일까요.

혼란을 느끼던 차에 떠오르는 대로 즉흥적으로 시를 썼습니다. 너 홀로 산책.

부제: 부모님을 위한 시

- 어버이날 선물로 아무것도 드리지 못했다. 꽃과 와인을 선물하려 했지만 내 게으름과 더불어 우유부단함 때문에 결국 5월 8일을 그냥 흘려보냈다.
- 문득 생각했다. 편지를 드리자고. 왠지는 모르겠는데 편지를 써야겠다, 생각했다. 시의 형식을 빌려서. 그리고 5월 8일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 한마디를 부모님께 적어서라도 드리고 싶었다. 사랑해, 라고.
    
엄마, 우리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엄마.
최근 한 달을 돌이켜보니 꽤나 큼직한 사건들로 가득했던 것 같아.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나는 수류탄을 던지고, 사격과 행군도 하면서
어느새 수료를 했고, 그 시간의 감옥 같던 곳에서 탈출하니
기관장과 사이가 멀어져 하루하루 갈등과 불안 속에서 지냈고,
이 와중에 아빠가 갑자기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에 오만가지 생각을 했던 한편,
허무감과 엄마 걱정으로 초조한 순간을 보냈으니까.
정말로 매순간이 나를 새로움보다는 난감한 감정과 생각으로 데려갔어.
그리고 정말로 믿겨지지 않아. 그토록 다사다난했는데,
불과 14일 전이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된다니.
    
엄마, 그리고 우리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빠
그 14일 동안 아들은 스스로 이런 질문을 했어.
“주호야 너는 어떤 어른이 될래?”
훈련소에서는 참는 법을 배웠고,
기관장에게서는 반면교사하며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웠고,
아빠 엄마로부터는 매순간의 소중함과 책임진다는 걸 배웠는데,
문득 이런 생각을 했어.
‘앞으로 내가 그런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 외롭고 쓸쓸하겠다.’

그런데   
내가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었던 엄마, 아빠
그래서 나보다 오랜 시간 외롭고 쓸쓸했을 우리 엄마, 아빠
어린 시절에 가족 간 대화가 별로 없었기 때문일까.
매번 말은 못하고 글로써밖에 표현 못하는 아들이지만
    
언제나 존중하고 사랑해.
    
170509 AM 3:03

-부제: 훈련소에서2

내 맘대로 걸어나갈 수 없는
39사단 신병교육대대
저 멀리 피어있는 벚꽃나무를
차려 자세로 바라보다가
문득, '이 세상에 원근법이 없었다면'

저 먼 벚꽃을
가까이서 볼 수 있을 텐데

멀어져도 멀어진 게 아닐 텐데

170407 AM 08:02


카푸치노가 너무 먹고 싶어
퇴근 길 카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카푸치노 카푸치노

우유 거품 한 입 베어 물고
글을 쓴다.
생각한다.
책을 읽는다.

그렇게 3시간,
카페를 나오며 문득 스치는 
생각 하나:

카푸치노야,
너와 함께 한 오늘
과연 5,500원 어치 값에 견줄 만한 좋은 글을 썼을까?

170308 즉흥시 PM 10:22

#1. 

난 그저 카푸치노
너가 주는 포근한 그리움을 한 입 베어 물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새 카푸치노
너와 함께 한 시간의 효율을 평가하고 계산하고 있었네.

#2.

"오늘 책을 읽다가 세상을 바꾸기보다는 세상에 맞춰 나를 바꾸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이득일는지 모른다."란 문장이 맘에 들었다. 청년들이 사회구조의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보다 자기계발 논리에 빠져 서로를 차별하는 사태에 아쉬워하는 맥락에서 나온 문장이었다.

우리 사회의 자기계발 논리는 참 우리 마음을 조급하게 만드는 것 같다. 내가 어찌할 수 없게 시간적으로 압박한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압축적으로 쓰기를 기대한다.

카푸치노를 먹는 데도 그런 논리를 적용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 시간 효율을 따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씁쓸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이 시를 썼다.

설향을 위한 시 / 윤이명


"짧은 시 한편으로
그게 된다면"

1.

원하는 순간에 하고픈 말을
모두 전할 순 없을까요.
당신에게도
제 마음 안의 그림을 보여줄 수 있다면
짧은 시 한 편으로
그게 된다면 얼마나 황홀할까요.

2.

가끔은 그런 마법 같은
시를 쓰는 사람이고 싶어요.
사람들은 긴 글보다 짧은 글을,
그리고 화려한 걸 좋아하니까요.

3. 

종이가 아닌 마음에 글씨를
새길 수 있는 사람
그 마음 따스히 차분한 사랑으로
덮어줄 수 있는 사람

161012 PM 1:56


설향을 위한 시 / 윤이명



5년 전 왔던 바람의 언덕에 다시 왔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는 것처럼 바람의 언덕으로향하는
길, 그날의 기억조각들이 내 마음을 하나씩 채운다.

그때 당신이 데려 온 길 위에 당신 없이 왔다.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나 잘 살아왔다고, 당신 덕분에
ㅡ마음 한 켠이 씁쓸함으로 떨리지만 
나 이제 환히 웃어요.

유성이 떨어졌던 그 여름 날의 밤
마음이 자라 다시 온 오늘 
겨울의 밤

당신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벤치를 찾아
말 없이 가 앉아보았다.
ㅡ이쯤이었나요? 유성이 떨어졌던 곳이

당신 없어 고요해진 언덕에
눈 감고 물었다.
그날 밤
당신은 왜 나를 여기로 데려왔던 건가요?

170204 씀.
170205 수정.


설향을 위한 시 / 윤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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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카턴씨, 안타깝게도 저를 알기 이전보다 제가 당신을 더 불행하게 만들었으니 ……”

-찰스 디킨즈,『두 도시 이야기』(창비)-

언젠가 몰이해의 한파가 나를 슬픔 속에 가두고
어느새 내가 슬프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기 전에
당신이 나에게 왔으면 좋겠다.
하얀 눈이 내리는 이유는 단단한 비애를 위함이 아닌
아름다운 봄이 오고, 눈 녹아 드러나는 세상, 잠시 비밀을 숨기듯
나에게 더 큰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라며
시린 겨울에 이불 속에 갇힌 고독, 나의 겨울에
나의 차가운 마음을 걷어내어 줄
당신이 나에게 왔으면 좋겠다.
겨울 바다를 걸으며 더는 넘어지지 말라며
이 넘어짐은 미끄러움이 아닌 나의 부족함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먼저 나를 토닥여 줄 수 있는
나도 모르는 나의 고통을 단지 아름다운 사랑으로 치유해주는 당신이
너무나 고마운 당신이
나의 겨울 바다로 왔으면 좋겠다.

2013. 5. 15

설향을 위한 시/ 윤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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