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UT

진화도넛학

- 도넛학의 한 갈래로, 도넛의 기원과 집단 구조를 이해하고자 시작되었다. ... 더 알아보기

 

 

교복 입은 나는 하교 후 학원이나 시내에 가는 또래들과 달리 곧장 집으로 간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오면 옷만 대충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는다. 별달리 할 일도 없는 나는 우두커니 앉아 생각만 한다. 하나, 둘, 셋, 넷, … 벽에 걸린 시계를 내려다 책상에 놓고 열두 조각 낸 후에 하나씩 입에 욱여넣는다. 열, 열하나, 열둘, …, 쉰여덟, 쉰아홉, … 열두 조각을 전부 해치우고 고개를 들면 새로 하나가 걸려있다. 다시 내려다 없애고, 또 내리기를 반복하다가 지루해, 바닥에 등을 깔고 누워버렸다.

바닥의 차고 습한 기운이 그대로 전해져 소름이 돋았다.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다가 어쩐지 서늘하고 서글픈 기분이 들어 몸서리쳤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세로로 길게 놓인 전신거울을 바라보았다. 얼굴과 거울 사이로 작은 무언가 지나갔다. 작고 무서운 검은 생명체를 지긋이 바라보다 벌떡 일어나 휴지를 둘둘 말아 그 위로 덮어버렸다. 우직, 연결 부위가 군데군데 끊어지는 절절한 비명이 들렸다. 그 순간, 집 밖의 어둠을 떠돌아다니는 생명체들이 기다리는 비극이 너무도 자세히, 생생하게 그려졌다. 손에 잡힐 듯한 고통에 팔이 저릿했다. 저 멀리 지구 반대편의 비극까지도 …

그날 밤 이 이야기를 가족에게 했더니 넌더리를 내며 혀를 차는 것이었다. 너는 왜 그렇게 유별나니. 남들은 그냥 지나가는 일을 가지고. 어디서 저런 게 나왔나 몰라.

나는 웃기로 하였다. 나의 절반을 제공한 기증자의 핀잔을 그냥 웃어넘기기로 하였다. 유별난 돌연변이! 우리는 매순간 놀라운 속도로 일어나는 변이에 무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화에서 돌연변이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모른다. 인류는 돌연변이 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돌연변이가 생존에 유리한 성질을 갖고 생존 경쟁에서 승리한다면 새로운 종, 신인류가 되는 것이다. 도대체 진화의 징후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나. 어딘가에 모여서 음침한 일을 모의하거나 뜬금없이 무시무시한 기계를 만들고 있을까.

본 적도 없는 상이 놀랍도록 자세히 그려지고, 들은 적도 없는 소리가 생생히 들린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비극적이지만, 이렇듯 진화의 징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무언가 보이고 누군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읊조리는 것은 여전히 귀찮고도 무서운 일이다. 이럴 때는 자려고 눕는 것이 상책이다. 눈을 닫고 잠을 청하면, 어두운 공간을 타고 또 다시 작은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교복 입은 나는 하교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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