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UT

처음 그를 만난 것도, 어쩌면 영영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일상의 관성을 깨고 무언가를 지불했기 때문이었다.

 

한창 돈을 벌고 있었다. 9시부터 12시까지 수업을 듣고, 30분 동안 밥을 먹고, 잠깐 사무실에 갔다가, 더러운 기분을 안고 들어간 수업을 망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아무리 남의 돈을 벌기가 힘들다지만, 어째서 돈을 가진 자들은 하나같이 근로자에게 월급에 상응하는 고통을 주려할까! 고통을 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상사의 부당한 대우와 근로자의 불성실한 태도에 대해 시간을 꽉 채워 높은 소리로 연설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어떤 불쌍한 근로자는 높은 소리가 고통을 주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다가 불현듯 자신의 유년 시절, 깊은 곳에 잠긴 추억에 빠져들고 마는데, 이것은 높은 소리보다도 더 큰 효과를 냈다. 근로자는 속에 가래처럼 걸린 추억을 뱉어내려 자신도 모르게 일그러진 표정을 만들어버렸는데, 그것을 본 고용주는 톤을 더 높여 근로자의 불쾌한 표정에 대해 (온전히 근로자의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위해) 연설을 한 장 더 펼쳤다.

 

다행히도 돌아갈 곳이 있었다. 씻고서 말도 안 되게 넘치는 뉴스를 뒤적이며 시간을 흘리다보면 잠깐 시간이 나거나, 잘 때가 되거나… 자기계발, 공부가 다 뭐야. 시간만 축내는 인생도 힘든 걸. 나는 내가 이 게임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항상 대들고 문제를 만드는 골칫덩어리다. 또, 남들이 하는 것이나 사는 것은 다 가질 수 있어야 사는 맛이 나지 않겠냐는 지론을 포기하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열심히 지론을 증명해보이면서, 도저히 세탁이 불가능한 기분을 안고 침대에 들 때, 다가올 하루가 이렇게 투명하게 보인다면 더 이상 보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밤은 조금씩 생명을 앗아가는 극악무도한 수집광이다.

 

그 날은 변화가 필요하다 싶어서 새로운 곳에 갔다. 명을 재촉하며 돈을 버니까 비싼 식당을 갈 수 있게 됐다. 인당 몇 만원씩 나오는 식사를 하면서, 고개를 드는 죄책감을 밟아 뭉갠 채로 조금은 불편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그 때, 양식에 곁들이는 초록 식물, 아스파라거스를 만날 수 있었다. 내 기준으로 그는 아무 맛도 없고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삭, 씹힌다는 것뿐이었다. 정말 내세울 것 없는 아스파라거스는 마요네즈에 버무린 콘만 먹었다면 심심했을 샐러드에 아삭 씹히는 맹맹한 맛을 첨가했다. 맹맹함도 첨가했다면 첨가라고 할 수 있다. 아주 드물게 소수점 단위로 이질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름과 맛을 알아내는 데 무려 20년이 걸렸다. 아사이 베리와 아마란스를 알아내는 데는 1년이 더 걸렸지만, 이 발견만큼은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배신감도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이 특징도 없는 녹색 식용 식물을 즐겨 쓰고 사랑하는지, 왜 내가 20년 동안 먹어보지 못한 음식에만 곁들이는지가 궁금했다. 이제는 큰 죄책감 없이 비싼 양식을 즐길 수 있지만, 의문은 하나도 해결되지 못했다. 가끔 만나는 아스파라거스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고, 아무 이유 없이 그가 불쑥 떠오르기도 한다. 마음먹으면 언제든 대가를 지불하고 만날 수 있지만, 나는 근본이 무력하고 무기력한 사람이기 때문에 굳이 그런 힘을 들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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