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UT

퍼렁 빛깔

 

늦은 밤, 어딘가에는 빛이 있었고,

빛 아래 무채색 벽을 타고 오르는 푸른 색채는 오래도록 시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색채는 밤을 닮은 검은 그림자를 품고 있었다.

 

그 옆으로 걷다보면 바람을 타고 오래된 이야기가 들렸고,

눈이 계속 같은 운동을 반복하며 지나간 자리가 그림자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줄곧 파랑새만을 그려댔다.

너는 그 이유를 궁금해 했고, 나 역시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손톱 밑, 무릎 아래 짙게 끼인 파랑새의 깃털을 박박 지우다가 알았다.

깃털은 말끔히 지워지지 않고 흔적을 남겼다.

그러니까 너를 다시 만날 때, 오므리고 있던 손을 펼쳐서 보여주려고 한다.

파랑새야, 푸른 색채를 남기고 떠났구나.

 

밤을 닮은 그림자는 모두 지난날일 뿐이었다.

 

 


기억하는 사람

 

나는 유독 지난날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자주 듣고,

나는 유독 지난날이 상영해주는 필름영화를 자주 봤다.

 

CCTV가 항상 우리를 찍고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우리가 찍힌 영상을 돌려보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영화 속 주인공이라든지, 위험인물이라든지, 그다지 중요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우리는 그냥 지나칠 법한 순간도, 잊고 싶은 순간도 잘 각색해서 한켠에 필름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보통 영화를 볼 때는 눈하고 귀를 이용하지만, 지난날이 상영하는 영화는 눈이 아닌 어딘가, 귀가 아닌 어딘가에서 열심히 상영되었다.

내 곁에 있는 너, 아니면 내가, 어느 누군가는 이 순간을 기억해줘야 아쉽지 않을 텐데. 어쩐지 너에게는 순간을 붙잡으려는 마음이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아서, 내가 붙잡아두고서 미련하게도 자주, 자주 돌려보고는 하였다. 가끔 쓴 눈물을 삼키고, 몰래 피식 웃음 짓기도 하는 게 이상해보이겠지만,

그래도 내가 기억하는 사람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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