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UT

일기

이제는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돌리는 것이  지겨워진다. 예전에 봤던  씬이잖아 다음 컷,  다음 컷. 물론 어떤 장면은 너무 슬퍼서 아직도 떠올릴 때마다 눈시울이 젖는다. 너와 마지막으로 통화하기 위해 베란다 구석에 쪼그려 앉는 나.  가끔은 그 장면이 더 격정적이지 않았던 걸 후회했다. 소리소리라도 질렀어야 됐는데.  이기적인 자식아, 그럼 왜 나는 너여서 힘들지 않다는 말을 했어? 너는 왜 변한게 하나도 없다고 했어? 하지만 이젠 너에게 물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반대편으로 가 너의 대사를  읊어준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야 나의 바람이었어. 나는 그만큼 너를 사랑했고 그게 변하지 않길 바랐거든..

그래 아마 너 스스로도 너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을거다. 넌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아 스스로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사람이었다. 아니 그 말은 틀린 표현이다. 기대치가 높은게 아니고 너는 그냥 네가  어떤 모습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니가 욕심을 덜어낸다고 조절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거지.  너는 나를  조금도 비겁하게 사랑할 수 없었던거다. 나라고 온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해야한다는 마음은 언제 혼자 먹었던거니? 어느 날 더 예뻐보이면 조금 더 좋아하고 징징대면  조금 덜 좋았다가 그래도 말은 잘 통하니까 헤어지지 말아야지 마음 먹을 수도 있잖아. 무슨 혼자 순수한 사랑은 다 하겠다고 난리야? 또 화가 났다. 나는 또 너의 대사를 지어내야 할 차례다. 나라고 적당한 사랑을 몰랐겠니. 

    너는 그날 전화기너머로 몇번이나 새나오는 울음을  욱여넣으며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너도  나처럼 스스로를 덜 싫어하게 되었다고 했다. 자기의 온갖 못난 모습까지 사랑해줄 사람이 또 있을까 잘 모르겠다고. 자기 인생에 나만큼 중요했던 사람은 없었다고.  그래서 자기는  연애라고 부르기엔 너무  버거운 무언갈 했던 것 같다고. 자신는 정말 인생을 걸었었다고  했다.

  넌 정말 미련하다. 그런 마음으로 일년넘게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을거다. 내가 널 몇년씩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으면 너는 이 정도로  빨리 지쳐 떨어지지 않았을까? 아냐 다시 19살로 돌아간다고 해도 넌 당장 내일 죽을 사람처럼 덤벼 들었을거고 나는 또 너를 거절할 수 밖에 없었을거야. 어쨌든 정말 미련해.   너에게 엮인 내 탓이다

나도 니가 내 말을 들어준다는 이유만으로 숨을 쉴 수 있었던 위태로운 날들을 기억한다  네가 친구도 아니어서 연락도 않는 누군가였을때도 나는 네가 이 세상 어딘가에는 숨쉬고 있다는  생각에 외롭지 않았다. 네가 나의 남자친구였을 때는 정말 평생 연애를 하면서도 이런 사랑을 못해보는 사람이 확실히 있을거라고 매일 생각했다 그래서 딱 일년동안 디즈니랜드에서 놀다가 그 다음 날 엄마가 죽어버린 아이와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지만

 너는 내 이야기를 하며 아 그 때  좋은 추억이었지 하고 기억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했다. 우리가  농담으로 나누던 말처럼,  내 결혼식에 와서 묘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치는 동창이 되는 일 따위는 없을거라고 했다. 나는 너한테 영원히 지나간 추억일 수 없을 거라고.  앞으로 연애를 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고

아마 그래도 넌 언젠가는 누군가를 만나겠지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난 뒤가 아닐까.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  너는 또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한걸까? 원래 진실은 기대와 현실 사이 어디쯤 있는 법이다 시간을 가로지르면 아마 너의 진심이 가장 진실에 가까울 거라고 나는 믿어주기로 한다. 


너는 부디 잘 지내달라고 했다

나는 더 오랜 침묵으로 버텨보려고 했지만 그 순간이 와버렸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네가 어디에서 보더라도 나답게 살고 있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소심하게 너에게 안녕이라고 말해달라고 한 뒤 짧게 녹음 버튼을 눌렀다 영원히 들을 수 없는 인사라 너무 듣고 싶은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지만 다시 듣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지막은 그렇게 지나갔고 나는 이별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나는 네가 지고 갈 나의 무게까지 느끼진 않을 거다 너도 나에게 그런 무거운 사랑이었나 나는 스스로에게 되묻겠지만 나는 확답하기 어려웠다  널 누구보다 사랑했고 너에게서 사랑하지 못할 어떤 면을 꼽아내기는 너무 힘들었지만 나는 너와 같은 마음으로 널 사랑하진 않았다. 나는 곧  괜찮아질거다 나는 너만큼 스스로를 괴롭히지는 않으니까. 나도 너를 한번도 추억한 적 없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이렇게나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다고. 그것만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