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UT

우린 여섯시쯤 만나기로 했었는데 제가 일이 좀 늦게 끝나 출발하니 일곱시 즈음 만나게 되었어요. 어쨌든 강남역이긴 했어요. 일곱시 이십분쯤이었던 것 같아요. 하늘색 옷을 입은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너무나 사랑스러워 꼭 껴안을 수밖에 없었고 고민하던 만큼 어렵지는 않게 서로 원하는 메뉴를 골라 놓은 터라 갈 곳은 이미 정해졌었어요. 11번 출구로 나와 걸어가다 오른쪽으로 꺾어 올라간 다음 왼쪽 편에 금방 찾을 수 있는 인도 카레집이었어요. 어느 곳에 들어가야 할지 고민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S가 미리 찾아놨었어요. 가려고 한 곳이 어디인지 헤맬 수도 있었을 텐데 아까 말한 대로 금방 발견해 버렸죠. 세 페이지짜리 메뉴판을 두어 번 반복해서 앞 뒤로 넘기자 메뉴가 정해졌어요. 코스요리처럼 여러 가지가 나오는 메뉴였어요 하나하나 사장님에게 우리의 선택을 알려드렸죠. 사장님 되게 친절했어요. 허니난과 버터난이 한꺼번에 나오게 할지 사장님의 충고대로 순차적으로 나오게 할지는 고민이 좀 됐어요. 배고프신거죠, 텀 없이 맞춰서 드릴게요, 하는 든든한 말을 듣고는 사장님 말씀을 따르기로 했어요. 샐러드를 반쯤 먹었을 때 카레가 나왔고 버터난이 나왔고 정말 버터난을 다 먹었을 때쯤 허니난이 나왔어요. 그 사이 우린 사진을 찍기도 했고 먹고 물론 얘기도 나눴죠. 다음으로 무슨 난을 고를지 또 조금 고민을 했어요. 플레인난 버터난 갈릭난 허니난 오징어먹물난이 있고 오징어먹물난은 어떤맛인가요 고소한가요, 고소.. 음 어떤 분은 비리다고도 하시더라구요, 라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야 갈릭난을 주문했어요. 회사가 재미없다는 말이 나올 때쯤 갈릭난을 다 먹어가고 있었는데 근처에 있던 H가 잠시 이리로 왔어요. 십오분 이십분쯤 머물다 갔을까요, 아 참 그 사이에 제가 가져온 선물을 꺼냈어요. 제가 S를 위해 만든 머리가 하얗고 몸통과 꼭지가 밝은 청록색인 모나미 볼펜, 예쁜 파란 무늬가 있는 태국 코끼리 인형장식, 그리고 제가 만든 팔찌요. 좋아했어요. 그래서 저도 좋았죠. 네 사진도 찍었죠. 너무 예쁘다는 말이 몇 차례 튀어나왔죠. 정말이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워요. ... 그러고는 목격하신대로에요. 계산을 하고 나와 계단을 내려오다가 S의 우산이 없는 걸 보고 제가 우산을 놓고 왔다는 걸 알았죠. 놓고 온 건 저뿐이었지만요. 네 그래서 우산을 다시 가지러 간 시간도 있었죠. 갖고 나와서 왼 편에 찻길 오른 편에 높은 건물들을 두고 걷고 있었어요. 스타벅스에 가던 참이었거든요. 반대편에서는 반대였겠죠. 저는 팔짱을 끼고 S를 보며 뭔가 말하고 있어서 고개를 돌렸을 때 걔는 벌써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그렇게 오늘의 확률란에 실릴 만큼 정말 몇 십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놀라운 일인가요? 어제도 꿈에 나왔던 것 같은 전 남자친구를 일요일 저녁 강남대로 한복판에서 마주치는 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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