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보폭이 늘어남에 따라 세상은 더 줄어들었고,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더 늦은 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유년기에는 금기시되었던 한 밤중의 고요,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캐치프레이즈같은 문장. 그 문장에 얽매여서 나는 해가 지고 난 세상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자라왔다. 어떻게 어떻게 흘러오다보니 내 나이의 앞자리는 더이상 1이 아니게 되었고, 핸드폰 청소년 요금제가 해지되고 영장이 날아오자 그제서야 '!' 를 느끼게 되었다. 모 TV프로그램의 이름처럼, 정말 어쩌다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밤을 마주했다. 질풍노도의 시기부터 나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그 '밤'. 낮과 다른 그 시간은 묘하게도 사람을 각성시키는 분위기가 있었다. 더 반응이 좋은 글을 쓰게 되고, 더 반응이 좋은 곡을 쓰게 되었다. 물론 낮에는 학업이다 뭐다 하며 창작활동을 하기 위한 시간 자체가 적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뭐랄까 밤이 주는 그 '느낌', 분명히 내 부산물에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마치 마약 같은 느낌이다. 밤공기와 별빛을 그러모아 혈관에 찔러넣으면 비슷한 느낌이 날까. 해가 지고 어둑이 몰려오면 '오늘'을 죽이려 달려오는 샌드맨Sandman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위협을 카페인과 레드불로 이겨내면, 마침내 자신을 마주한 용감한 생존자에게 '밤'이 주는 축복이 있다. 그것을 받은 후의 밤은 모든것이 선명하다, 태양 아래의 그것보다. 지평선을 따라 자리한 희미한 실루엣들조차 강렬하게 번뜩이며 나에게로 투사된다. 달빛은 고요를 뚫고 내리하며 그 주위로 별들이 날카롭게 반짝인다. 그 모든 분위기를 꾹꾹 눌러담아 악보에 쏟아놓던, 캔버스에 흩뿌리던, 아니면 스크린 너머의 하얀 종이에 펴 바르던 분명히 그것은 낮에의 그것보다 더 반짝이게 담겼다, 적어도 내 세상에서는.
물론 그런 밤이 매번 오지는 않는다. 정신 멀쩡히 깨어있을 때에도 그저 고요하게 흘러가기도 했다. 그럴 때에는, 분명 같은 밤 아래 자리한 누군가에게 자신의 호의를 베풀고 있을 것이겠거니-하고 샌드맨의 칼날에 찔려 마취당하듯 침대 위에서 식어간다. 가끔은, 그런 선명한 밤이 찾아와도 시험이나 다른 환경적 요건때문에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없는 때도 있다. 그럴 때에는 이틀이나 3일 뒤 땅을 치고 후회하거나, 또는 잠시 급한 일을 미뤄두고는 미친듯 창작을 시작했다. 후자의 선택도 다른 의미에서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뿐이다.
어느 선택이든 만족하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이라니. 어쩌면 이런 우매한 욕심을 일깨우기 위해 밤이 선명함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둔하다, 그래서 때때로 찾아오는 그런 밤에는 주저하지 않고 더 많이 후회하는 선택을 고를 뿐이다. 앞으로도 밤의 그 고요속에서 더 찬란한 무언가를 건져내길, 그래서 내 작품이다 이름 붙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