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Q: 당신은 누구인가요?
A: 지나가던 군인입니다
휘목이와 작업하면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부분이라면 음악적 견해차이(?) 였어요.
그게 가장 당혹스러웠던 이유는 당시 우리 둘 다 음악적 견해랄 게 딱히 없었기 때문이죠
서로가 '최소한 너무 구린' 것만은 피해가자.. 했는데 그게 참 달랐던 게 모든 희노애락의 시작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뻔한 그림인데 그때는 왜 그걸 몰랐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엔지니어고 휘못이는 디자이너
그래서 저는 몇몇 기술적인 조언이나, 구현하고자 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구현해주는 정도로
곡 자체나 가사 등은 아예 노터치하는 고립주의 노선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작업 순서도 기타 녹음 - 보컬 녹음 - 나머지 세션 작업(시퀀싱)이라는 참 근본없는 방식이 되었고요
결과물은 지금 들어보면 노력한 흔적은 나는데 사운드가 참 맘에 안 들어요
사실 그땐 믹싱을 지금만큼 알지도 못했고, 또 통장에 5만원 넣고 다니던 가난한 학생이었으니까요
군대가야 돼서 심지어 최종 마스터는 곡 전체를 다 돌려보지도 않고 뽑아버렸습니다
그래도 투박한 사운드가 나오긴 했는데
다음엔 더 좋은 모니터 장비를 쓰던지 해서 저음을 저렇게 말도 안 되게 올려놓지 말아야죠
작업 체인에서 저와 휘못이는 거의 지킬과 하이드였습니다
한 명은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고 한 명은 풀세션 사운드를 지향하니까
제가 밤에 몰래 슬쩍 악기를 더 넣으면 휘못이는 낮에 어떻게 그걸 잡아내서 빼고의 반복이었죠
그래서 어느정도 균형이 맞았나 봅니다
사실 코드진행 단조로운 것도 너무 별로여서 기타 코드를 어퍼스트럭처로 둔갑시켜버리고 다른 화성을 쓰기도 했습니다(비밀입니다)
아무튼 이런 양 극단주의자끼리의 절충안이 맘에 들었던 곡은 '작은 언덕' 입니다.
악기가 20개가 넘어가는데 오히려 신나서 작업했습니다. 대단원 느낌도 나고
그래서 내가 그렇게 맨 끝 트랙으로 넣어달라고 사정사정을 했는데.. 인정사정 없더라구요 ㅠ
제일 처음 작업한 곡은 '綠'이었는데
데모를 들어본 휘못이가 식겁하는 바람에 아마 베이스만 남기고 다 뺐었죠?
세션을 따로 저장을 안 해서 방금 다시 뽑아 봤는데, 피아노가 어디갔는지 까먹어서 이피를 대신 넣었습미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메트로놈 없이 기타녹음해서 듣고 따라치느라 타임이 엉망인데 다 맞추려면 한세월 걸렸겠죠
지금 생각하면 빠른 포기가 참 다행이었던 것 같네요
'상실의 시간'
림 모 현준이와 전에 곡에 대해 얘기하던 중에 역시 재즈기타의 대가답게
'상실의 시간' 휘목이 기타 솔로가 너무 난해한 거 아니냐고 제게 물어봤었는데
그것도 사실 브릿지 부분에 플룻이 들어가듯이 솔로에도 플룻을 넣을 계획이었습니다
이렇게요.
나쁘진 않았지만 휘못이의 단칼에 날라갔습니다.
무난무난하지만 무난무난한 것으로는 안된다 라는 예술가적 식견이었을까요
아무튼 전 이곡 기타 솔로도 좋습니다 ㅎ_ㅎ
이 외에도 이것저것 삭제된 악기와 라인들이 참 많았어요
몇 시간 들여 만들고 짤리고 몰래 넣었다 또 짤리고
작업체인 무지막지하게 비효율적이었네요
'밤에 걸려온 전화' 일렉기타랑 신디 사운드는 정말 아까웠는데...
아무튼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시행착오도 많이 하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늘 더 넣고 우겨넣고 채워넣던 걸 빼고 비우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거든요
마르코 셰프도 "레시피는 최대한 간단해야 돼요,
뭔가를 더 넣는 건 쉽죠, 그러나 훌륭한 요리사라면 언제 더 넣지 말아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라고 그러던데
심심해서 유투브 보다가 갑자기 혼나는 느낌이었어요
세상 참 각박하네
이제는 모두 간단히! 해보려 합니다
간!단!
좋은 밤 보내세요

2015년 7월의 휘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