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아래에서
나무가 손짓했다. 안녕, 하고.
여름날의 정오 부근이었다. 태양은 익숙하게 나를 태우려고 째려보고, 나는 한껏 선크림을 바른 얼굴을 들이밀며 기싸움을 했다. 물론 나는 질 걸 예상하고는 모른 척 나무 그늘로 들어갔다. 그때가 처음으로, 다른 종으로부터의 전언을 들었던 순간이었다.
그저 흔들거림이었다, 처음에는.
안녕.
그저 그림자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잘지내니.
잎새가 그늘을 따라 나를 쓰다듬는 듯 했다.
보고싶어, 보고싶어서 올려다 본 하늘에는 네가 자리했다.
안녕.
너는 살랑거림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몸짓을 자아내고 있었다. 너의 그늘 속에서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여름의 한 가운데 곧게 서서, 나는 그 어느때보다 따듯한 찰나를 맞이했다. 당신은 최소한의 몸짓으로 세상을 담아내었다. 당신이 스르륵 움직인 그 순간, 여러 갈래로 쪼개진 파아란 하늘이 나에게 담겼다. 그 무언의 언어로 나는 당신의 상냥함을 이해했다, 안녕. 그렇게 무한한 순간을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았다. 당신이 내려준 친절은 어느새 멀리 흩어지고 있었다. 다시금 올려본 하늘에는 성난 얼굴로 날 노려보는 성가신 동그라미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한 발짝 옆으로 몸을 옮겨 그와 상종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여전히 당신은 나를 위해 기꺼이 따듯한 시원함을 나려주었다.
그렇다, 당신은 한 없이 자연스러웠다. 그 고정된 몸체에서 뿜어져나오는, 나비의 날갯짓과 같은 흔들거림이 모든 존재의 본질적 고립됨을 뚫고 울려퍼져갔다. 당신의 말단부는 끊임없이 동적이었지만 중심은 단단히 정적이었다. 토지를 있는 힘껏 움켜쥔 당신의 뿌리가, 중력을 딛고 일어나 고개를 치켜드는 당신의 몸체가 너무나도 경이로워- 나는 다시금 마침 없는 정지에 머물렀다. 나는 당신과 닮아갔으나, 태양에 밀려버린 그늘을 따라 자꾸만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무심한듯 여리게 바라보는 당신은 이상적으로 자연스러웠다, 아니, 자연 그 자체였다 - 당신은 스스로 그러했다.
그런 것이었구나. 흘러가는 모든 것들은 변할 수 밖에 없구나. 당신은 그 작은 살랑임 하나로 나에게 수 많은 생각을 불어넣어주었다. 당신의 잎사귀가 속삭이고 지저귀었다. 모체에게서 떨어져 나온 순간, 그 순간에 일생에서 가장 강렬한 표류를 경험한 후, 당신은 떡잎을 피워낸 곳에서 거목이 되었다. 세포단위에서까지도 단단한 벽으로 불변성을 결집하는 당신은 나와 본질부터 달랐다.
나는, 매 시간 한 발짝 옆으로 움직여야 하는, 그러한 존재였다. 내가 이렇게 의미없는 수평이동을 할 동안, 당신은 조금이라도 더 창공에 닿으려 세상을 향해 몸을 일으키겠지. 단단한 껍질에 포개어진 무궁한 초록은 곧 온 풍경을 향해 뻗어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손짓에 세상은 일렁이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러한 일렁임에 몸을 싣고, 당신의 일렁임을 향해 매 시간 한 발짝씩 옆으로 이동할 것이다. 내 발걸음은 당신의 손짓처럼 세상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내뿜는 깊은 울림은, 그 만큼이나 깊은 뿌리에서, 뽑아올려진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리도 나약하고 물렁한 살덩이라니. 당신은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허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손바닥을 대어 당신을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다른 한 손으로 나를 더듬어 보았다. 당신이 더 높게만 느껴졌다. 내가 스러져 가는 순간에도 끝 없이 하늘과 닿아갈 당신이 보였다. 나의 발은 뿌리가 아니어서 끝 없이 움직여야 함이 가장 강한 슬픔으로 나를 적셨다. 내 생의 모든 움직임을 굳혀 단단한 반석을 세운다면, 당신을 마주보며 최후를 같이할 수 있을까. 수 만번 해와 달이 돌고 지평에서 휘감기는 시간이 나를 갈기갈기 찢지 않을까. 이루어지지 않을 망상에 취한 내 모습이 한심하여, 나는 생각하기를 그만하고 발자국을 몇개 더 만들어내었다. 멀리서 바라본 당신은 사르륵거렸다. 사르륵, 사르륵.
나는 그렇다면 당신의 양분이 되어야겠다. 고마웠어. 네가 조금이라도 더 하늘을 뚫고 올랐으면 한다. 내 살덩이와 푸석한 뼛가루가 당신의 혈관을 타고 올라가, 당신의 순간 순간에 베여있는 움직임이 되었으면 한다. 변함없이 서 있으며 산들거리는 당신을 뒤로 하고, 나는 몇개의 풀잎을 밟으며 돌아간다, 움직일 수 있으면 가야만 하는 곳으로. 세상은 나에게 당신만큼이나 큰 그림자를 허락하지 않았나 보다. 함께 있었을때 합쳐졌던 암녹색 거대한 그늘, 그 속에서 빠져나온 내 그림자는 많이 야위어 보였다. 이렇게 볼품없음에도 그러나, 당신은, 내 그림자 안에 당신의 따스함을 담아 나에게 보내었다.
초록 내음이 발목을 타고 나를 적셔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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