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UT

탄생을 위해 낙하하는 낡은 영혼이 벌어진 시간의 간격 속에서 자신의 허물을 하나씩 벗어내려놓는 것. 나의 인생을 토대로 하여.

먼지 새겨진 신발, 하얗던 운동화끈은 제 세월보다 수 배나 더한 피곤함을 안고 있었고, 난 마침내 그 피곤한 덩어리를 풀어주기로 결정하였다. 더 이상 번복은 없다.

몇 만번은 고쳐 맸던 매듭을 끝까지 풀어내 신발 고리 구멍 하나, 하나에서 길고 긴 황색의 실타래를 뽑아낸다. 무언의 미련과 함께 깔끔하게 비워진 신발끈의 흔적은 약간의 흉터만을 간직한 채 새 살을 돋아 자취를 지워버렸다. 이제 내 앞에 놓인 이 신발은 다시 신을 수 없다. 난 맨발의, 날 것의, 수면 아래에 있는 저 세계로 빠져들어 다시 기어야 한다. 목을 가누고, 발가락을 꿈틀이는 법 부터 익혀야 한다. 핏빛의 소쿠러미에 들려있던 그 자그마한 시절부터.

이 실타래들은 이렇게도 촘촘하게 날 재단하고 있었는가

난 이렇게 묶인 채 불판 위에서 달궈지고 있었다. 찰나의 환영을 비추어내기 위해서. 저 동굴 깊숙이 비춰질 찰나의 윤곽선을 위한 땔감으로 살아왔다. 내가 그걸 인지한 순간 나는 신발 안에 움크려 있었고, 신발끈을 부여잡은 채 밤낮을 덜덜 떨고 떠는 그 모습이었다.

유약해진 나의 틈새로, 마침내 손톱의 상처와 헤진 틈 곳곳으로, 실타래는 제 나름의 혈관 줄기들을 나의 안에 심어버렸다. 내 심장은 맑고 끈끈한 혈액 대신 눅눅한 실타래에 의해, 그저 '연명할' 정도의(오히려 생의 끝을 바라보게 할 정도의 고통스러움을 선사하는) 불쾌한 자극을 공급받았다. 손톱 밑의 그 상처를 애써 드러내기 전까지는, 이 '자연스러운' 신발끈의 돌기와 그에 이어진 실타래가 나의 핏줄인 줄로만 알면서, 마치 태어나길 그 기다란 끈에 매여 요리조리 그 짧은 주기에 맞춰 진동하며 원을 그리는 그 눅눅한 생이 내 전부인 줄로만 알고 살아갔다. 그렇게 살아왔더랬다.

 

 

손톱 밑의 그 '자연스러운' 상처. 그 흰 모퉁이를 잡아끌었다. 사지가 뒤틀리고 온 몸이 팽창하고 수축하는 느낌, 그 느낌 끝에 난 비로소 이 고통의 끝이 내 신발에서 멈추었단 걸, 그리고 고스란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나의 '꼭짓점'으로 정의되어 있는 이 신발을 나의 선 안에서 떼어내려 한다. 그를 벗어내려고,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내 전부를 칭칭 휘감고 있던 이 끈을 뽑는다. 뽑았다. 신발을 벗기로 한다.

 

 

경사각에 아슬하게 위치한 채로 내 맨발은 모퉁이를 향해 다가간다. 서서히. 발을 내디딤에 있어 끝은 없으나 그 내디딤의 끝은 허공을 향한다.

이 찰나의 순간, 나는 중력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동시에 치열한 중력의 노예가 된다. 그대, 여느 때보다 빠르게 추락하고 있지만 시간은 여느 때보다 그대와 하나가 되어 자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자유로운 노예이자 치열하게 빠른 느림 속에서 그녀는 비로소 그의 생을 만끽하며 맛본다. 모서리 없는 내디딤 속에서 여생을 누린다.

나를 속박하지 말아줘, 그대여. 자유롭게 팔을 휘저어봐. 널 부여잡던 도형들은 이제 모두 모서리가 없어.

캐릭터 1 순환 풀을 뜯는다. 뜯어. 뜯어. 뜯어. 뜯어. 풀이 잘 자라려면 거름을 주어야 하거든 그러기에 넌 뜯겨져 나가야 해. 풀을 위해서 그런거야 풀아. 저 옆의 나무는 제 잎사귀로 숨을 쉬고 뿌리로부터 깊숙이 물을 빨아들여 살아가고 있는데요. 나는 나무가 될건데요. 나의 초록빛을 흙더미에 내주고 싶지 않아요. 제발.

캐릭터 2 순환 불을 껐다 켜. 껐다 켜. 껐다 켜. 자 이제 어둠과 빛을 알겠지? 내게 감사해야 해. 하지만 왜 저는 이 문 밖을 나갈 수 없는 거죠? 왜 항상 두꺼운 천막으로 창문을 가려야만 하는 거죠? 나의 태양은? 태양을 앗아가고 전등을 준 채로 그 스위치 마저 당신의 지문만이 어루만질 수 있다면 나는 그 무엇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죠. 말해줘봐요.

캐릭터 3 순환 뺨을 치고, 그 누구보다 따스하게 안아줬어. 하지만 또 나의 뺨을 쳐. 그대는 표정조차 없었지. 하지만 금새 그 눈빛은 금비로 가득 차. 뜨겁게 안아줘. 동시에 너의 손바닥은 여느 때보다 매서워졌어.

캐릭터 4 "최음제를 탄 지독한 칭찬 몇 마디가 날마다 집 앞으로 배달되어 자꾸만 나의 여정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배달된 소포를 열지 않을 수는 없지."

발산하는 점과 선 규칙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면. 그들이 모여 이룬 공간.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무거운 공기. 그로부터 벗어나 새어나올 수 없는 나의 공기. 나의 체취.

떨어지는 5초 동안 평생 해왔던 것의 몇 배 이상의 왕성한 두뇌 활동으로 그 '낙하인'은 그를 반 세기로 인지해. 그리고 그녀는 평온한 채로 눈을 감지. 칠십 삼세면, 적지만서도 억울할 만큼은 아니니까. 그리고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비행'의 상태로 반 세기를 누린 거니까. 그녀는 눈을 감았다. 가 떠.

'수면 아래'의 삶은 사실 중력이 없는 무제의 공간이야.

난 아프지 않았는데 그들은 내 목구멍에 약을 비집어 넣었어. 쏟아지는 물줄기에 그 약더미들은 모두 내 구석 구석 들어가 앉아있게 되었지. 과한 처방으로 인해 결국 나의 몸은 '아파'져 버렸는데, 이는 무슨 '약'으로 치료해야 할까. 빌어먹을 약을 또 비집어 넣는 수 밖에 방법이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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