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오류 2018. 1. 1. 22:48

 

<축지법과 비행술 - 나의 가장 이르고도 길었던 비행을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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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기는 결코 내가 그려왔던 것처럼 정겨운 향기만으로 이뤄져 있지 않았다. 내가 그렸던, 무언가의, 토속적이고 따스했던 그 향기는 꼭 '한국'의 그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무엇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점차 잠긴다. 잠겨진다.

"여러분, 오늘 공지할 것이 있어요."
반 아이들은 집중하지 않는다. 여느 때처럼, 추가되는 숙제, 혹은 급히 생겨난 쪽지 시험에 대한 공지와 당부, 아니면, '이런 게 올바른 인생이다'라고 하면서 뱉어지는 올가미같은 소리들. 그게 전부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들은 일찍이 선생님의 등장과 함께 귀를 닫은 지 오래다.

"같은 반 친구 00이가 내일이면 미국에 갑니다."

멍-해지는 공간. 아리송하다. 완전히 촌은 아니기에 큰 코와 금발에 푸른 눈동자 외에도 실체가 있는 곳임은 다들 인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스펀지밥- 파워퍼프걸- 같은 만화와 가상의 공간을 넘어서라면 교실을 메우고 있는 그곳의 초등학교 3학년생들에겐 낯선 미지의 세계와도 같다.

침묵이 찰나를 가득 메우고 있던 중, 노란 브릿지를 물들인, 마수리 스타일의 한 뿔테 안경 아이가 입을 연다. 괜시리 반가워지는 반달 웃음을 눈에 품은 채 내뱉는 말,

"야- 유00, 나도 거기 가봤어! 디즈니 월드!! 맞지! 난 5일이나 갔다왔다! 넌 어디로 가냐? 기념품 꼭 사와라 -"

꽤나 친했던 - 어린 아이들 특유의 '때리고 도망치기'에서 비롯된 일종의 친함을 형성한 - 그였기에 나의 입은 쉽사리 떼어지지 않았다. 나의 여행은 그와 같은 5일- 혹은 한달 가량의 단기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의 눈빛들과 마지막일 수도 있단 걸 생각한다면, 이 곳에 주저앉아 엉 엉 울고만 싶은 마음이었다. 당시의 나에게는 한달조차 마치 평생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졌었다. 하물며, 2년이라니. 하루 전까지 애써 외면해왔던 2년이라는 시간 앞에서 한달은 마치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 되었다. 작은 내 두 손은 어느새 주먹을 쥐고 있었다. 이 어린 두 손은 이별에 대처할 방식을 차마 떠올리지 못한 채 바들바들- 자신을 떨 뿐이었다. 

"응-", 짧은 외마디의, 신음소리와도 같은 작은 비명 끝에 여기저기에서 '나도' 하는 소리가 좀 전의 어색했던 공간을 떠돈다.

난 여기저기 던져지는 '나도'에 점차 태연해져가며, '치 - 됐어-, 선착순이었어-' 따위로 수를 두는데 점차 익숙해지고, 자신에게 날아오던 '나도'의 화살들은 이제 대부분 자취를 잃고 바닥에 맴돌고 있었다. 더 이상 날아올 화살이 없다.

다시 교실이 조용해졌다. 선생님은 발화자로서의 위치를 조심스레 건네받고, 이 교실에서 유일한 어른으로서 존재하는 자신의 역할을 막대하게 느끼며 차분히 말을 이어간다.

"00이는 가족들과 함께 2년 동안 미국 동부의 피츠버그라는 작은 도시에서 공부를 하다가 돌아올 거에요. 영어도 많이 늘고, 많이 자라서 돌아오겠지요? 그때까지 건강하라고, 우리 한 학기 동안 함께했던 00이에게 인사해줍시다."

우리의 탄생과 함께 지어진 아파트 단지에서 나고 자라온, 한결같은 얼굴에 익숙했던 우리들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평생'과도 같은 이별에 압도되어 눈물을 머금고 뿌옇게 된 시야로 한 동안을 맴돌았다. 일제히 시선들은 나에게로 모였다가, 자신의 발 밑으로 흩어졌다. 인사와 눈물방울들은 반의 작고 큰 창문들을 넘어 옆반까지 새어들어갔다. 그 날의 복도는 유난히 침울해보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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