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utist 3번지/나의 빈칸

배꼽에서 비롯된 참사

알 수 없는 사용자 2017. 2. 17. 11:44
배꼽에서 비롯된 참사

지상의 동사에 밀착한 아이는 시인이 되지 못했고
형용사의 풍광에 매혹돼 길들여지지 못했다

첫 숨을 운 산부인과를 걸었다
복도 양 모서리는 늘어선 하얀 군단에
하얀 군단은 늙은이의 주례에
솜털이 돋아난 몸을 기울이길 수어번
낡은 가운 속 카페인 몇 그람 넣어준 말대가리 동료
이미 죽어 세상에 없다

주의 절반을 카페인으로 지새운 의사는
아이의 탯줄을 엉뚱하게 잘랐다고 했다
어색하게 매듭진 배꼽 줄기 위로
태생 같은 불효가 스며들었다

아이의 머리칼이 허리와 목선을 다섯 번 왕복했을 때
위태로운 발목은 늘 긴장해 있었다
매끈한 왼 무릎과 멍이 든 오른 무릎 사이로
몇 차례의 불륜이 다녀갔다
규칙적으로 변덕을 부리는 그늘의 팔목
네모진 교과서를 이탈한 활자는 만실의 여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얌전히 재단된 상징 곁에
불(不)과 비(非)를 사랑한 건 필연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한 곳에 흰머리를 버리고
은퇴를 모르는 선수의 응원가는
과거의 미지근한 영예를 틀니처럼 갈아꼈다
자동문은 늘 아이 앞에서 닫혔고
문은 언제나 정직했다
모체와의 결별이 남긴 동심원의 문양
씹다만 활자의 부스러기가
어색하게 부푼 아랫배 위로
몰래 훔친 계절처럼 놓여 있었다